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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하는 생활162

한 사람, 한 발짝 2015. 1. 1 이따금 잊을만하면 구-우-웅- 보일러 돌아가는 소리가 들린다. 근래 내 생활 중 이전과 크게 달라진 게 있다면 집에 들어오자마자 보일러를 켜는 일일 것이다. 집이 추운 것은 여전하나 차가운 몸을 비비며 두꺼운 옷을 껴입고 버티던 지난 날과 달리 추운 곳을 조금이나마 데워보려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친구들과 함께 월동 준비도 했고 이제 나는 혼자서도 보일러를 트는 사람이 되었다. 겨울이 추운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추위를 피해 들어온 곳까지 똑같은 추위여서는 곤란하다. 벌벌 떠는 몸에 익숙해지면 말도, 글도, 버릇도, 생활도, 관계도 벌벌 떨게 된다. 더군다나 가끔이나마 지인들이 방문하는 이곳이 한결 같은 추위에 익숙해져 있어서는 더욱 곤란하다. 집 또한 기운이라는 게 있어 자신에게 .. 2015. 1. 1.
꿈―오마주 2014. 12. 2 써야할 문장을 쓰지 못하고 버티다 지쳐서 쓰러진 잠, 꿈을 꾸었다. 좀처럼 꿈을 꾸지 않는다 호기롭게 말하곤 하는 편이지만 억압된 것들의 귀환을 무슨 수로 막을 수 있겠는가. 극장이었다. 정성을 다해 만든 것처럼 보이는 잡지가 있었고 스크린 쪽에선 정성일 선생께서 강연을 하고 계셨다. 꿈 속에서 보는 정성일 선생, 꿈이라는 스크린으로 상영되는 정성일 선생의 육성(肉聲). 아직 한번도 실물로 뵙지 못한 정성일 선생의 모습-이라기보단 그 목소리의 생생함으로!-을 꿈 속에서 뵈었다. 아마도 이 강연을 기획한 주최자로 여겨지는 이의 질문이 길게 이어졌다. 질의응답 시간이 아니었음에도 이 질문자는 정성일 선생의 말을 잘라 먹으며 긴 질문을 이어갔다. 그런데 그 질문이란 게 1994년 MBC .. 2014. 12. 2.
다-함의 비극 2014. 9. 21 / 11. 12 _남천동 2012. 6~2014. 9 2년 넘도록 '지독'하게 살았던 남천동 집에 대한 기억을 좀처럼 회집할 수가 없다. 도망치듯 찾아든 곳이어서 그럴까, 주변의 으리으리한 집들 사이 볕이 잘 들지 않던 그 낮고 어두운 기운에 짓눌려서일까, 가난해서 하찮은, 하찮아서 가난해져버렸던 어떤 끝이 있었기 때문일까. '내가 내게 행복을 허락'하기 위해 날개짓을 하듯 사뿐히 내려 앉은 이 집에 더러는 누군가가 왔다갔고 함께 밥을 지어먹기도 했지만 그 누구도 내가 사는 집을 돌보지 않았고 나 또한 그러한 요청을 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떠난 자리는 늘 어지러웠고 그 어지러운 흔적들을 정리하면서 이 집의 가난함을 매번 대면해야 했었다. 사람들이 남기고 간 어지러움 속에 이 집에 살.. 2014. 11. 16.
곁과 결 (1) : 설거지와 글쓰기 2014. 11. 10 한순간에 쌓아올리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언제라도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는 '일상'이라는 세계. 그 세계를 붙들고 또 다지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시간. 하루에 후라이팬을 세 번정도 닦다보면 좋은 후라이팬 하나가 한 사람의 삶에 꽤 큰 영향을 줄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세끼를 꼬박 챙겨먹은 날, 마지막 한술을 채 삼키기도 전에 싱크대로 가 입안에 가득한 밥알을 꼭꼭 씹으며 설거지를 했다. 싸고 양이 넉넉한 세제를 풀어쓸 때마다 지나치게 많이 일어나는 거품을 매만지며 '이건 좀 너무 하지 않은가'라는 생각을 반복하다 베이킹파우더로 세제를 바꾸었고 후라이팬을 세 번 닦던 날은 세제를 쓰지 않고 설거지를 해보았다.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설거지 방식이었지만 이상한 확신이 나를 이.. 2014. 11. 10.
우리들의 실패ぼくたちの失敗 2014. 10. 17. 13일~14일. 비가 오는 송도에서 종일 모리타 도지(森田童子)가 남겨놓은 앨범 8장을 반복해서 들었다. ぼく와 君(きみ)의 세계 사이에서 눅눅했고 가끔 질식했으며 내내 맴돌았다. 정처 없는 맴돎이 미로를 만든다는 것을 한없이 반복되는 소용돌이 속에서 얼핏 알게 되었다. 그걸 알게 된다고 해서 맴돎을 멈출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미로 속에서 빙글뱅글 돌다보면 노곤하고 나른해진다. 홀로 지뢰밭에 갇혀 있는 시간. 움직이거나 무언가를 건드리면 터진다. 산산조각 난다. 한 발자국도 뗄 수 없고 그 무엇도 건드릴 수 없으니 이곳을 빠져나갈 수 없다. 같은 자리를 맴돌다가 멈추고, 맴돌다가 멈춘다. 그러다 도리 없이 다시 같은 자리를 맴돈다. 森田童子Morita Doji, 'ぼくたちの失敗.. 2014. 10. 17.
장보기(1)-생활의 두께 2014. 10. 15 마땅히 장 볼 건 없었지만 ‘우리 마트’로 향했다. 가방 속엔 장바구니 두 개가 곱게 접혀 있으니 무엇이라도 담을 수 있다. 송도에 이사온 이후 외출이 있는 날이면 하루도 거르지 않고 장을 보고 있다. 처음 ‘우리 마트’에 온 날 가장 먼저 6개 짜리 생수 가격을 확인했다. 남천동 ‘빅 세일 마트’보다 저렴한 생수가 있다! 두 개 묶음으로 판매되는 CJ의 어묵은 400원정도 더 비싸다. 4개 묶음 햇반도 700원가량이나 더 비싸다. 양파도, 땡초도, 마늘도 모두 2-300원 가량 더 비싸다. 헌데 640ml 맥주는 200원이 저렴하다. 그렇게 이것 저것, 하나 하나 살펴보며 30분 정도 마트를 배회하니 '이상한 감각'이 깨어나는 느낌이었다. 나조차 모르게 각인되어 있던 생활 필수품.. 2014. 10. 15.
고장난 기계(2) 2014. 10. 12 단순하고 명징한 일상이 매일 지속되고 반복되는 것이 새삼 신기한 일임을 알게 되는 순간은 그것이 중단되거나 파괴되었을 때다. 너무나 복잡하고 비논리적이어서 하나의 어휘로 지칭할 수 없는 탓에 우리는 그것을 짐짓 모르는 척, 슬그머니 '일상'이라고 무심히 불러온 것이다. 이 복잡하고 신기한 일이 일상이라는 이름으로 지속되고 반복된다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동시에 위험한 일이기도 하다. 일상이 (의심없이) 지속된다는 것은 우리가 일상이라는 이 복잡하고 비논리적인 구조가 어떻게 '지속'이라는 상태로 유지되는지 조금도 모르는 상태에 놓여 있음을 가리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복잡한 기계를 처음 만나는 순간 또한 그것을 편리하게 사용할 때나 아무런 문제 없이 작동할 때가 아니라 고장났을 때.. 2014. 10. 12.
일미一味, 우정의 맛 2014. 10. 6 이사한 송도 집에 도착한 첫번째 우편물, 김이설 소설가의 중편소설 한 권. 여름에 쓴 짧은 글에 대한 답장처럼 도착한 두꺼운 편지 같은 책의 안쪽에 적혀 있는 직접 쓴 정갈하고 고운 글씨를 읽다가 김이설 작가의 소설을 처음 읽었던 시절을 떠올려본다. 2006년, 하단의 어느 지하실에 옹기종기 모여 그 계절의 단편들을 함께 읽었던, 지금은 사라진 모임. 사람과 장소는 바뀌었지만 나는 꽤 오랫동안 후배들과 함께 ‘비평 세미나’라는 것을 진행했었는데, 김이설 작가의 첫번째 소설집도 그 모임에서 읽었다. 기회가 닿아 짧은 글을 썼고 아마도 그 글을 김이설 작가가 읽었나 보다. 첫 페이지의 문장들과 ‘작가의 말’을 천천히 읽고 밥을 지었다. 어제, 내 친구 진희가 만들어준 일미 반찬. 도시락.. 2014. 10. 6.
노인의 몸짓으로, 노인이 되어버린다 해도 2014. 10. 3 남천동 시절, 볕이 잘 들지 않는 내 방 주변으로 두 채의 빌라가 들어섰다. 근 4개월 동안 매일 아침 6시부터 나는 하나의 사실을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집을 부수는 것보다 집을 짓는 소음이 더 크다는 것을. 무언가를 없애버리는 것보다 새롭게 무언가를 만드는 것이 더 요란하다는 것을. 매일 아침 침대에 앉아 어쩌면 당연한 그 사실을 뒤늦게 알아 버린 것을 책망이라도 하듯 불성실한 잠을 요란하게 깨우던 기고만장한 소음 속에서 나는 몇 시간이고 그렇게 그 무엇도 하지 못하고 황망하게 있었다. 어느날 밤, 내가 살고 있는 동네에서 가장 큰 집의 허물어진 잔해더미 위로 조용히 꿈틀거리는 움직임에 섬칫, 발걸음을 멈추었던 적도 있다. 곳곳에서 움직이던 그림자들은 더렵혀진 장판과 각목을 느.. 2014. 10. 3.
곁의 조난자 2014. 9. 1 조난자를, 가라앉고 있는 이를 구조할 수 있는 이는 누구인가? 거대한 화물선과 유조선은 조난자를 알아보지 못한다. 높고 거대한 그곳에서는 조난자가 보이(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조난자를 발견하는 이는, 조난자를 구조하는 이는, 또 다른 조난자다. 인도양을 항해하던 한 남자가 선박 컨테이너 박스와 충돌해 조난 당한다. 예측불가능한 바다의 조건, 삶 속의 도사리고 있는 불가항력적인 재난. 한 남자가 바다 위에서 거의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과정은 거의 모든 것을 수행하는 일이기도 했다. 그렇게 마지막 남은 고무보트 또한 불에 타버린 뒤 가라앉는 (2013)의 마지막 시퀀스의 한 장면. 가라앉고 있는 이를 깨우는 하나의 불빛.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바다 위에서 그는 거의 모든 것을 했다... 2014. 9.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