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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 없이 모이는 정동 이방인(affect alien)_문학의 곳간(90회) 약속 하지 않고도 모이는 사람들. 여전히 조금은 낯선 사람들이 모여 이달에도 을 엽니다. 친하지 않기 때문에, 아직도 서로 낯설기 때문에 ‘낯선 감정’을 선뜻 꺼내놓고 말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낯선 것들을 깎아내며 길들여온 관습처럼 차차 익숙해지는 방식이 아니라 또 다른 낯섦이 등장할 수 있게, 더 많은 낯섦이 나타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가는 힘으로 이 모임이 이어지고 있는 건 아닐까라는 생각도 해보게 됩니다. 11월, 90회 에선 캐시 박 홍의 『마이너 필링스』를 함께 읽어보려고 합니다. 아시아계 미국인으로서 경험한 “분노, 좌절, 불만, 우정, 애증, 고집, 자기회의, 양가감정, 투지” 등의 복잡한 감정을 생생하게 기록하고 분석한 저작입니다. 이 책과 함께 어디에도 기록되거나 등록되지 않은/못.. 2022. 11. 9.
각자의 '짐승' 일기 2022. 10. 29 김지승의 『짐승일기』는 ‘쓸 수 없는 것들’을 쓰려고 하는 의지로 가득합니다. 날짜가 아닌 요일로 재편집되면서 선형적인 시간성이 흐트러지고 사건과 감정의 희미한 인과도 지워지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읽을수록 감정과 사건이 누적되는 게 아닌 어딘가로 휘발되어버리는 특이한 읽기 체험을 하게 됩니다. 형용모순이지만(무엇보다 수사적으로 읽힐 수도 있겠지만) 『짐승일기』를 읽으면서 내내 ‘지우는 글쓰기’에 대해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모든 걸 지우는 게 아니라 ‘어떤 것들’을 지워가는 글쓰기 말입니다. 다시 생각해보면 우리 모두의 글쓰기 속에도 ‘어떤 것들을 지우기 위한 의지’가 반영되어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잊지 않으려 무언가를 기록하려고 할 때조차, ‘남겨두려는 의지’가 기어코 서 .. 2022. 10. 29.
도둑 러닝(2)_달리기 살림 2021. 10. 27 언제나 그렇듯 좋아하는 일을 하다보면 ‘왜 이 일을 하는가?’라는 물음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 가난한 프리랜서들의 공통 친구라고 할 수 있는 이 자기심문적인 질문은 자주 예고도 없이 초인종을 누르곤 한다. 한창 러닝에 빠져 있을 때 ‘왜 달리는가?’에 대해 자주 묻곤 했는데, 뾰족한 답을 구하진 못했다. 다만 이 메타화의 과정이 피로하지 않았고 다소 흥미진진한 모험처럼 생각되었다. 그런 이유로 나는 즐기는 맘으로 이 질문을 품고 지낼 수 있었는데, 볕도 좋고 바람도 좋은 10월의 어느 날, 벌판을 달리던 수만년전의 인류가 떠올랐다. 빠르진 않았지만 그 어떤 동물보다 오래 달릴 수 있던 인류의 뜀박질에 대해서 말이다. 수년전 1일 1식을 하는 동안 허기를 넘어선 ‘텅 빈 상태’가 잠.. 2022. 10. 27.
도둑 러닝(1) 2021. 4. 20 미루고 미루다가, 며칠을 벼르고 벼르다가 나왔다. 날이 많이 따뜻해져서 반바지를 입고 달렸다. 미루고 미룬 건 귀찮아서가 아니라 주치의라고 생각하는 한의원 선생님의 ‘땀을 흘리면 안 된다’는 단호한 처방을 어길 수가 없어서인데, 이성과 상식으론 납득이 되지 않는 처방이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말할 수도 없다. 러닝을 하면 아무래도 건강해지니 뛰고나면 좋다는 게 ‘상식’이지만 내 경우엔 달리고나면 건강을 걱정해야 할 판이니 이 속앓이는 누구와도 공유할 수가 없다. 그래서 나의 달리기는 일탈적인 성격이 강하다. (지난 겨울, 달리는 동안 자꾸만 오정희의 을 떠올렸던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요즘은 밤에 자고 아침에 일어나는 생활에 공을 들이고 있어서 대개 밤 10-11시쯤에 달렸던 것과 .. 2022. 10. 27.
직업이라는 경계선을 밟고 2022년 8월 27일 토요일_스튜디오 ‘직업’은 현실과 현장의 단어입니다. 추상이나 낭만 따위가 끼어들 틈이 없습니다. 엄정하고 냉정하며 때때로 비참하고 자주 한숨을 내쉬게 되는 직업이라는 세계. 그 뒤에 따라 붙는 ‘전선’은 필시 싸움(戰)이 이루어지는 위태로운 줄(線)을 말하는 것이겠죠. 그러니 이라는 제목에서 ‘르포’를 떠올리는 건 자연스럽습니다. 이 책의 서문 첫 문장을 빌려오겠습니다. “은 과거, 현재, 미래를 막론하고 노동 현장에서 꿈꾸듯이 일하고 있는 이상한 사람들이 쓴 수기 모음입니다.” ⏤송승언, 《직업 전선》, 봄날의책, 2022, 5쪽. ‘수기’ 모음이라고 했는데, ‘꿈꾸듯이 일한다는 것’과 ‘이상한 사람’이라는 점이 걸립니다. 이 부분이 왜 걸리는 걸까요? 마음에 들기 때문입니다... 2022. 10. 22.
오늘 품고 있는 물음 : 수면 아래의 표정들 2022년 9월 19일 지난주 목요일 k작가와 저녁을 먹고 용두산 공원 근처를 산책했다. 오늘 홀로 그 산책로를 걸으며 옆에 k작가가 있었다면 무슨 이야길 했을까를 떠올려보았다. k작가가 아니어도 할 수 있는 말일 수도 있지만 지난 목요일 산책과 이어지고 있는 느낌도 분명해서 k작가가 옆에 있다고 생각하면서 속으로 말을 해보고 작업실로 돌아와서 옮겨보았다. “요즘 품고 있는 물음은 뭔가요? 질문이라는 말이 조금 더 자연스럽겠지만 그건 (해)답을 떠올리게 하니까, 물음이라고 말하는 게 조금 더 정확할 거 같네요. 저는 요즘 ‘표정들’에 대해 자주 생각하고 있어요. 수면 아래에 가라앉아 있다가 어느 사이에 떠오르는 것들. 그런 것들은 대개 변사체처럼 느닷없거나 경악스러운 것들에 가깝지만 꼭 그런 것만 있는 .. 2022. 9.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