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깜빡임을 쫓아_96회 <문학의 곳간> 사귐 시간 주제 캐슬린 스튜어트의 (신해경 옮김, 밤의책, 2022)은 재빨리 그린 ‘캐리커처’처럼 보이기도 하고 어떨 땐 별다른 변화가 없음에도 꼼꼼하게 기록한 ‘관찰 일지’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때론 낚아채듯이, 때론 지겨울 정도로 촘촘하게 우리 주변을 흘러다니는 알 수 없는 힘을, 째깍째깍 무심하게 흐르는 시한폭탄 같은 불안을(아직 터지지 않았지만 터지지 않았다는 그 사실 때문에 터질 것만 같은!), ‘평범하게 들썩이는’ 온갖 것들을 놀라울 정도로 생생하게 포착하고 있습니다. 이 책을 읽는 동안 어떨 땐 보이고 어떨 땐 보이지 않는 것, 어느 날엔 들렸는데 어느 날엔 들리지 않는 것, 어떤 날은 읽을 수 있지만 어떤 날엔 읽히지 않는 것이 늘 있었다는 걸 기억해야 할 거 같습니다. 그건 오늘 읽히지 않는다는 게 앞.. 2023. 7. 11.
모임이 쓰다 2023. 7. 2 1. 화명동 '무사이'에서 이미상 소설가가 쓴 『이중 작가 초롱』(문학동네, 2022)을 함께 읽었다. 여러가지 의미로 흥분과 긴장을 가득 머금고 읽었는데, 참석자들이 이야기를 잘 풀어주어 모임을 하는 동안에서야 마음껏 소설집에 빠져들 수 있었다. 진지하고 무거운 주제를 재미나고 통렬하게, 무엇보다 생생하고 정확하게 다루면서도 기록되지 않고 보이지 않았던 사람들을 향해 이야기 하고 있다는 게 좋았다. #문단_내_성폭력 이후 트위터를 비롯한 여러 피드에서 흐르고 있던 목소리들, 촘촘하게 따져묻고 집요하게 추적하다가 어느 사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목소리들을 떠올리면서 읽어내야 했기에 한달음에 읽진 못했지만 신나고 즐겁게 읽었다는 이들이 내어놓은 이야기에 기대어 소설집 곳곳에 슬픔뿐만 .. 2023. 7. 2.
질 자신_도둑러닝(5) 2023. 5. 2 "자신이 없어요, 질 자신이." 이세돌의 '밈'으로 알려진 이 말을 달리기에 빗대어 누군가에게 했던 적이 있다. 1km를 5분대로 뛸 수 '없는' 강박과 다급함을 토로한 것이었지만 속도와 기록에 대한 즐거운 비명에 가까운 너스레이기도 했다. 장림에서 다대포를 거쳐 장림 포구를 돌아 장림 시장 둘레를 달리면 10km가 조금 넘었다. 일주일이나 10일에 한 번씩 달리며, '평생 달리면서 살아야겠다'고 다짐을 했던 순간도 있었다. 한창 집중하고 있던 복싱을 더 잘 하기 위해서, 링위에서 지치지 않기 위해 시작한 달리기였지만 '먼 거리를 온힘을 다해 달려서 다다른다'는 단순함과 명료함이 좋았다. 달리는 동안 거의 어김없이 한두 가지 생각을 떠올리거나 품게 되는 것 또한 좋았다. 달리는 동안 .. 2023. 5. 4.
4월 일기 2023. 4. 17 망한 사람으로부터 배움_비온후책방 강연을 마치고 최종규 작가님과 새벽까지 이야기를 나눴다. 늘 그렇듯 경이로운 이야기가 많았지만 칫솔질 하는 방법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주신 것이 유독 선명하게 남았다. 이틀날부터 자연스레 최종규 작가님이 알려준 방식으로 칫솔질을 하며 최종규 작가님을 생각했다. 작가님 치아 상태는 좋아보이지 않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칫솔질 이야기에 더 믿음이 갔다. 그저 망하기만 하는 경우는 흔하지만 드물게, 망하면서 배울 수 있다 생각하기 때문이다. 대체로 사람들은 망한 이야기를 ‘고백’하지만 어떤 이는 망하면서 알게 된 것을 슬기롭게 건넨다. 망한 세상으로부터 배울 게 있고 망한 생활 속에서도 캐낼 것이 있다. 슬기롭게 망할 수야 없겠지만 망한 뒤에 한줌 정도에.. 2023. 4. 27.
만큼과 까지(계속) 2023. 4. 19.
평범하게 들썩이는 : 일상을 탐험하는 다섯 개의 오솔길 평범하게 들썩이는 : 일상을 탐험하는 다섯 개의 오솔길 길을 가다가 허리를 숙여 무언가를 줍는 사람이 있습니다. 뭔가 대단한 걸 발견한 건 아닐 겁니다. 바닥에 있는 것을 주워 올릴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걸음을 멈추고, 허리를 숙여, 주울 수 있었던 게 아닐까요. 바닥에 버려진 것은 누군가의 줍는 몸짓으로 잠시 특별한 것이 됩니다. 모두가 공평하게 나눠가진 일상을 향해 몸을 기울이는 일, 허리를 숙여 바닥에 있는 무언가를 줍는 일은 살림을 매만지고 다독이는 손길과 이어져 있습니다. 허리 숙여 바닥에 떨어진 무언가를 주워 올릴 때 무언가가 반짝하고 나타납니다. 그 반짝임을 문학이라고 불러도 좋지 않을까요. 2013년 여름부터 시작한 이 이라는 프로그램으로 2023년 상반기의 문을 엽니다. 아무것도 아닌.. 2023. 2. 3.
꿈이라는 비평 2023. 1. 22 1 누군가의 꿈 속으로 들어가는 꿈을 꿨다. 그이의 꿈 속에서 노닐다 나온 뒤 나는 사람들을 모아 꿈 속에서 내가 본 것들을 이야기 했다. 내가 꾼 꿈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누군가의 꿈이 말한 것을 알리기 위해 사람들을 모은 것이었다. 꿈을 꿨다기보단 꿈이 나를 찾아온 것이기 때문에 꿈이 내게 말한 것을 사람들에게 알려야 한다 생각했다. 잠에서 깨어 꾸었던 꿈을 생각하며 급히 적었다. 어쩌면 비평은 누군가의 꿈에 초대 받은 이가 쓰는 글이라고. 누군가의 꿈에 (초대 받아) 들어갔다가 나오는 것. 내가 꾸는 꿈이라 생각되지만 누군가의 꿈에서만 꿀 수 있는 꿈이라는 게 있다. 나는 그 꿈 속을 마음껏 돌아다니며 마음껏 느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꿈은 내가 꾸는 꿈이 아니다. .. 2023. 1. 29.
흐트러짐 없이 사위어가는 것 2023. 1. 21 오소영 작가의 개인전 (2023. 1. 20~30)을 보기 위해 '18-1 gallery'에 들렀다. 1,2층을 여러번 오르내리며 작품 앞에 오래도록 서 있었다. 선 채로 서성였다. 작품 앞에 서 있는 동안 적막하고 쓸쓸했지만 사위어간다는 것이 꼭 사라지는 게 아닐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들판에 서서 사위어가는 것을 지켜보(내)는 동안 사그라지는 감정에 대해 생각했다. 타오르는 것, 타들어가는 것, 꺼져가는 것이 하나의 몸으로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피어오르는 몸은 흐트러짐이 없다. 작품 앞에 오래도록 서 있어야 했던 이유를 알 거 같다. 오래도록 들판을 보던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멀찌감치 떨어진 저 들판과의 거리는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오랫동안 지켜(보)낸 시간의 기록이.. 2023. 1. 24.
생활파(派)의 모험 2020. 8. 14 습관과 버릇에 대한 생활글을 써보자는 제안은 각자의 생활에 대한 ‘점검’과 ‘반성’을 위한 것이라기보단 생활 속에서 홀로 ‘탐구/탐험’(조형) 하고 있는 ‘장소’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어보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슬픔과 고통에 대한 토로조차 타임라인의 흐름 속에 휘말려 들어가 그저 하나의 게시물로 업로드 되고 업데이트되는 형편이지만, 만약 당신이 ‘생활파(派)’라면 끝없이 업로드되는 먹거리들의 아귀다툼 바깥에서 애써 조형하고 있는 원칙에 대해 할 말이 있지 않을까 해서요. 가령, 오늘 (남들처럼) 먹은 것들을 전리품처럼 전시하는 것만이 아니라 오늘도 끝내 먹지 않은 것들의 목록 같은 것 또한 있겠지요. 누구도 관심가지지 않은 것들, 업로드할 수 없고 업데이트가 불가능.. 2023. 1. 18.
그 사람의 말(투) 2020. 6. 27 권여선의 새 소설집엔 늙은 레즈비언의 (희박한) 사랑 이야기를 다룬 이란 소설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그 소설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옵니다. “그런 미묘한 고갯짓은 오로지 디엔만이 할 수 있었고 그런 모습으로 사진에 찍힌 적도 없으니 그것은 디엔과 더불어 영영 사라져버렸다.”(91~92쪽) 오래전에 곁을 떠난 연인의 ‘고갯짓’은 그 사람만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서명일 것입니다. ‘디엔’의 그 서명을 알아볼 수 있는 건 연인이었던 ‘데런’밖에 없겠지요. 연인이란 그렇게 오직 서로만이 알아볼 수 있는 ‘희박한 언어’를 공유하고 있는 관계이기도 하겠습니다. 마음의 모국어라고 할까요, 희박한 언어를 공유하던 이가 떠나버리면 (마음의) 모어를 잃어버린 상태가 되어버려 내내 외국인처럼 살아가야.. 2023. 1.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