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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 러닝(1) 2021. 4. 20 미루고 미루다가, 며칠을 벼르고 벼르다가 나왔다. 날이 많이 따뜻해져서 반바지를 입고 달렸다. 미루고 미룬 건 귀찮아서가 아니라 주치의라고 생각하는 한의원 선생님의 ‘땀을 흘리면 안 된다’는 단호한 처방을 어길 수가 없어서인데, 이성과 상식으론 납득이 되지 않는 처방이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말할 수도 없다. 러닝을 하면 아무래도 건강해지니 뛰고나면 좋다는 게 ‘상식’이지만 내 경우엔 달리고나면 건강을 걱정해야 할 판이니 이 속앓이는 누구와도 공유할 수가 없다. 그래서 나의 달리기는 일탈적인 성격이 강하다. (지난 겨울, 달리는 동안 자꾸만 오정희의 을 떠올렸던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요즘은 밤에 자고 아침에 일어나는 생활에 공을 들이고 있어서 대개 밤 10-11시쯤에 달렸던 것과 .. 2022. 10. 27.
직업이라는 경계선을 밟고 2022년 8월 27일 토요일_스튜디오 ‘직업’은 현실과 현장의 단어입니다. 추상이나 낭만 따위가 끼어들 틈이 없습니다. 엄정하고 냉정하며 때때로 비참하고 자주 한숨을 내쉬게 되는 직업이라는 세계. 그 뒤에 따라 붙는 ‘전선’은 필시 싸움(戰)이 이루어지는 위태로운 줄(線)을 말하는 것이겠죠. 그러니 이라는 제목에서 ‘르포’를 떠올리는 건 자연스럽습니다. 이 책의 서문 첫 문장을 빌려오겠습니다. “은 과거, 현재, 미래를 막론하고 노동 현장에서 꿈꾸듯이 일하고 있는 이상한 사람들이 쓴 수기 모음입니다.” ⏤송승언, 《직업 전선》, 봄날의책, 2022, 5쪽. ‘수기’ 모음이라고 했는데, ‘꿈꾸듯이 일한다는 것’과 ‘이상한 사람’이라는 점이 걸립니다. 이 부분이 왜 걸리는 걸까요? 마음에 들기 때문입니다... 2022. 10. 22.
오늘 품고 있는 물음 : 수면 아래의 표정들 2022년 9월 19일 지난주 목요일 k작가와 저녁을 먹고 용두산 공원 근처를 산책했다. 오늘 홀로 그 산책로를 걸으며 옆에 k작가가 있었다면 무슨 이야길 했을까를 떠올려보았다. k작가가 아니어도 할 수 있는 말일 수도 있지만 지난 목요일 산책과 이어지고 있는 느낌도 분명해서 k작가가 옆에 있다고 생각하면서 속으로 말을 해보고 작업실로 돌아와서 옮겨보았다. “요즘 품고 있는 물음은 뭔가요? 질문이라는 말이 조금 더 자연스럽겠지만 그건 (해)답을 떠올리게 하니까, 물음이라고 말하는 게 조금 더 정확할 거 같네요. 저는 요즘 ‘표정들’에 대해 자주 생각하고 있어요. 수면 아래에 가라앉아 있다가 어느 사이에 떠오르는 것들. 그런 것들은 대개 변사체처럼 느닷없거나 경악스러운 것들에 가깝지만 꼭 그런 것만 있는 .. 2022. 9. 19.
회복이라는 알 “당신이 믿는 것을 알지 못하면서도 어떤 행동을 한다는 것, 이는 진정성의 부재라기보다는 진정성의 증거였다.” ―레슬리 제이미슨, 『리커버링』 1974년 11월 말, 영화감독 베르너 헤어초크는 젊은 영화인들의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옹호했던 평론가 로테 아이스너가 위중하다는 전화를 받는다. ‘아직은 그녀의 죽음을 허락할 수 없다’는 일념으로 독일 뮌헨에서 프랑스 파리까지 걸어가기로 마음을 먹게 된다. 걸어가면 그녀가 살아 있을 거라는 확신을 품고 떠난 무모해 보이는 여행기, 『얼음 속을 걷다』(베르너 헤어초크, 안상원 옮김, 밤의책, 2021)엔 혹독한 추위와 질척거리고 험난한 시골길, 어둡고 늙은 지방 사람들의 표정만이 이어진다. 출판을 염두에 두지 않고 기록했던 탓에 걷기로 결심한 것을 후회하거나 자주 .. 2022. 3. 24.
Perfume Genius, <Lookout, Lookout> Perfume Genius, _Interplay, Busan_2011년 9월 15일 2022. 3. 22.
불쑥 건너는 밭은 잠에서 깨면 몸보다 손가락이 먼저 움직인다. 몸에서 “가장 멀리 뻗어나와” 있는 손가락은 무언가를 잡기보단 오늘도 무심하게 환한 이 세상이 무사한지 더듬어볼 뿐이다. 극적인 것이나 드라마틱한 기대 없이. 벽에 귀를 가져다대면 벽 너머의 희미한 소리가 금지된 무언가가 번지듯 천천히 선명해지는 것처럼, 멀리서 오고 있는 열차의 기척을 희미하게 느끼기라도 하듯 지난밤과 잠과 꿈과 몸의 기척을 더듬어본다. 서로가 너무 가깝거나 아득해서 온통 뿌옇고 희미할 뿐이다. 물 한 잔이 필요하다. 작은 파도가 일렁일 때 잠시 나타나는 물보라처럼 차갑지 않은 물 한 잔이면 몸에도 작은 물보라가인다. 소꼽놀이용 청진기를 가져다대보는 꼴이겠지만 미동 없는 몸을 무심하게 살피며 전자시계의 숫자가 바뀌는 것처럼 변함없이 무사.. 2022. 3. 20.
2022년 상반기 [문학의 곳간] 나, 당신, 우리에 대해-처음부터 끝까지 말하기 오랜만에 인사드려요. 두 달간의 방학을 마치고 2022년 상반기 '문학의 곳간' 문을 열어요. 올해 상반기는 매달 한 권씩 공지하던 방식을 조금 바꿔서 하나의 주제에 집중해보는 방식으로 진행할 예정입니다. 라는 주제로 자서전에서부터 유서까지, 불가해한 삶의 실타래를 풀어가는 저마다의 작업을 통해 작은 배움을 구해보려고 합니다. 전체 프로그램은 아래와 같습니다. 82회 올리버 색스, 『온 더 무브』, 이민아 옮김, 알마, 2015_2022년 3월 26일_책방한탸 83회 비마이너 기획, 『유언을 만난 세계』, 오월의봄, 2021_2022년 4월 30일_미정 84회 디디에 에리봉, 『랭스로 되돌아가다』, 이상길 옮김, 문학과지성사, 2021_2022년 5월 28일_미정 85회 비비언 고닉, 『사나운 애착』, .. 2022. 3. 13.
문학의 곳간 74회_박완서・장미영, 『못 가 본 길이 더 아름답다』(수류산방, 2012/2018) [74회 문학의 곳간] 안내 74회 문학의 곳간에선 2011년에 작고하신 박완서 선생님이 남긴 최후의 구술이자 가장 종합적인 자전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박완서-못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수류산방, 2012)를 함께 읽어보려고 합니다. 4회(2013년, 장전동 헤세이티)에서 박완서 선생님의 소설 『엄마의 말뚝』(박완서 전집, 세계사)을 함께 읽었던 바 있습니다. 올해는 박완서 선생님이 작고하신지 10주기가 되는 해이기도 합니다. 올초부터 박완서 선생님을 기리는 행사가 곳곳에서 열리고 있고 또 올해 안에 출간 예정된 책도 꽤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만나야 하는 작가인 박완서 선생님이 남긴 (마지막 구술작업이어서 더욱) 생생한 육성을 따라, 늦게 작품 활동을 시작했지만 누구보다 부지런히 작업했.. 2021. 4. 9.
문학의 곳간 73회_박솔뫼, 『우리의 사람들』(창비, 2021) [문학의 곳간 73회] 박솔뫼, (창비, 2021) 일시 : 2021년 3월 27일 토요일 오후 3시~ 장소 : 중앙동 ‘회복하는 생활’ 인원 : 열 명(세 자리 남아 있습니다) 참가비 : 만원(우리은행 1002-746-279654) 문의 : 010-9610-1624 주최 : 생활예술모임 곳간 협력 : 회복하는 글쓰기 2021. 3. 22.
이상한(queer) 생태⏤퀴어, 자립, 독립 1 2013년 8월의 어느 저녁, 부산 남구 대연동 재개발지구에 사람들이 모였다. 나는 백무산의 시집 『그 모든 가장자리』(창비, 2012)에서 몇 편의 시를 추려 그날의 참석자들에게 선물로 건넸고 시를 건네 받은 이들은 오래된 선풍기 곁에서 각자의 목소리로 천천히 낭독했다. 시 낭독과 함께 우리는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시에 관한 것은 아니었고 조금은 엉뚱하고 쓸모를 찾을 수 없는 이야기가 대부분이었다. ‘백수들의 유쾌한 실험실’이라 자신을 명명했던 이상하고 특이했던 모임, 은 2013년 여름이 시작될 무렵 도시재개발로 인해 퇴거 통보를 받았지만 이를 ‘재(능)계발’이라는 근사한 이름으로 변주해 하고 싶은 작당을 마음껏 할 수 있도록 한달간 주변 사람들에게 무상으로 그 장소를 분양했다. 그때 생.. 2020. 12.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