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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려진 자리, 남겨진 자리 2022. 12. 30 가 칸 국제영화제에 초청되었을 때 한 인터뷰에서 어느 러시아 기자는 고레에다 영화를 일러 “남겨진 사람을 그린다”고 말한 바 있다. 그건 고레에다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했던 자신이 만들어온 영화의 알짬이었다. 영화 데뷔작 (1995) 또한 남겨진 사람에 관한 이야기다. 빛을 쫓아 갑작스레 곁을 떠나버린 이(이쿠오)로 인해 어둠 속에 남겨져야 했던 이(유미코). 이 시종일관 칙칙하고 어두운 톤을 유지하는 건 이 영화가 상복을 벗지 못한 사람에 관한 이야기라는 걸 말한다. 유미코가 줄곧 이쿠오의 죽음에 붙들려 있는 건 자신이 버려졌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버려진 것과 남겨진 것은 다르다. 이라는 제목은 무언가를 좇아 갑작스레 여기를 떠난 이쿠오(들)의 알 수 없는 열망(이끌림)을 가리키.. 2023. 1. 9.
뒷부분 김덕희 전시 , 영주맨션, 2022년 12월 18일 2022. 12. 26.
Take this Waltz—아픈 세상에서, 함께 춤을 레너드 코언(Leonard Cohen, 1934~2016)의 라이브 명반 (2009)의 수록곡 ‘Take this Waltz’를 특별하게 기억하는 이유는 레너드가 특유의 진중하고 느긋한 목소리로 무대 위에서 함께 연주하고 있는 멤버들을 소개하는 순간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DVD로도 발매가 되었기에 그 실황 공연도 관람한 바 있는데, 그는 중절모를 벗어 한손에 쥐고 악기를 연주하고 있는 멤버 옆으로 다가가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며 눈을 맞추고 고개를 숙여 예의를 표한다. 그가 샤론 로빈슨(Sharon Robinson)의 곁으로 다가가 그이를 소개할 때 우리는 샤론이 단순히 백 보컬이 아니라 레너드의 오랜 친구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 앨범의 첫 트랙인 ‘Dance me to the end.. 2022. 12. 19.
삶터(현장)-씨앗-매듭-곳간_문학의 곳간(91회) [91회 문학의 곳간] 안내 91회 에선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 자서전 『영화를 찍으며 생각한 것』(이지수 옮김, 바다출판사, 2017)을 읽어보려고 합니다. 그간 만들어온 영화 만큼이나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글 또한 정갈하고 사려깊습니다. 적어도 한 편 정도는 이 감독의 영화를 보지 않았을까 싶어요. TV 다큐멘터리 연출자 출신이어서인지 보통 사람들의 평범한 모습에 깃들어 있는 생생함을 구현하는 데 탁월한 작가입니다. (2011)의 한 장면을 떠올려봅니다. 가게와 집이 위 아래로 나뉘어 있는 스낵바 2층 방에서 아이들이 짧은 여행(이자 가출)을 떠나기 전 둘러 앉아 각자가 바라는 기적에 대해 이야기 하는 장면입니다. 이때 영화는 극적인 방식이 아니라 다큐멘터리와 같은 시선으로 작지만 맑은 바람을 이야기.. 2022. 12. 8.
끄트머리 눈곱처럼 작은 글씨 2022. 12. 7 ‘농촌 어린이 시집’ 『일하는 아이들』은 이오덕 선생이 1958년부터(1952년 것도 한 편 들어가 있다) 1977년까지 20년 동안 주로 농촌 아이들과 함께 쓴 시를 그때그때 모아두었던 것을 엮은 책이다. 지난날 농촌에서 자란 아이들의 마음을 품은 시집이라는 드문 책이지만 으레 작고 연약한 것을 굽어보는 나쁜 버릇이 발동해(티나지 않게!) 은근히 업신여기며 한쪽으로 미뤄두고 읽을 생각조차 하지 않다가, 이오덕 선생의 발자취를 뒤쫓다보니 자연스레 이 책을 펼치게 되었다. 「고침판 머리말」을 읽자마자 한동안 넋을 놓고 말았다. 단박에 여러 꼭지를 읽지 못하고 한두 꼭지정도만 겨우 읽고 오래도록 뒤척인 탓에 책을 읽는 방식을 바꿔보았다. 마음을 단단히 먹고서야 책을 펼치는 게 아니라 맑.. 2022. 12. 7.
새 것과 헌 것 오늘도 우당탕탕거리며 일터로 나섰다. ‘우당탕탕’이란 말엔 어떤 사연이 있는 듯 보이지만 실은 게으름을 감추기 위한 호들갑에 지나지 않는다. 우당탕탕거렸다는 건 오늘도 눈뜨자마자 게으름을 피웠다는 말이다. 일터에 갈 땐 할 수 있는만큼 깨끗하고 단정한 옷을 입으려고 한다. 마침 깨끗한 양말이 없어 새 양말을 꺼내 신고 잰걸음으로, 아슬아슬하게 일터에 도착했다. 우당탕탕-게으른-잰걸음-지긋지긋한-아슬아슬. 오늘의 내 살림을 헤아려보다 새 것에 대해 다른 생각의 줄기를 가지게 되었다. 새 것은 기분좋고 설레는 마음을 갖게 한다. 포장지를 뜯어 사용하지 않아도 든든하고 쾌적하다. 특히나 가난한 이들에게 새 것은 더 가지지 못하는 게 아쉬울 뿐 형편만 허락된다면 더 많이 쟁여두고 싶은 것일테다. 심지어 쓰지 않.. 2022. 12. 1.
약속 없이 모이는 정동 이방인(affect alien)_문학의 곳간(90회) 약속 하지 않고도 모이는 사람들. 여전히 조금은 낯선 사람들이 모여 이달에도 을 엽니다. 친하지 않기 때문에, 아직도 서로 낯설기 때문에 ‘낯선 감정’을 선뜻 꺼내놓고 말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낯선 것들을 깎아내며 길들여온 관습처럼 차차 익숙해지는 방식이 아니라 또 다른 낯섦이 등장할 수 있게, 더 많은 낯섦이 나타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가는 힘으로 이 모임이 이어지고 있는 건 아닐까라는 생각도 해보게 됩니다. 11월, 90회 에선 캐시 박 홍의 『마이너 필링스』를 함께 읽어보려고 합니다. 아시아계 미국인으로서 경험한 “분노, 좌절, 불만, 우정, 애증, 고집, 자기회의, 양가감정, 투지” 등의 복잡한 감정을 생생하게 기록하고 분석한 저작입니다. 이 책과 함께 어디에도 기록되거나 등록되지 않은/못.. 2022. 11. 9.
각자의 '짐승' 일기 2022. 10. 29 김지승의 『짐승일기』는 ‘쓸 수 없는 것들’을 쓰려고 하는 의지로 가득합니다. 날짜가 아닌 요일로 재편집되면서 선형적인 시간성이 흐트러지고 사건과 감정의 희미한 인과도 지워지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읽을수록 감정과 사건이 누적되는 게 아닌 어딘가로 휘발되어버리는 특이한 읽기 체험을 하게 됩니다. 형용모순이지만(무엇보다 수사적으로 읽힐 수도 있겠지만) 『짐승일기』를 읽으면서 내내 ‘지우는 글쓰기’에 대해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모든 걸 지우는 게 아니라 ‘어떤 것들’을 지워가는 글쓰기 말입니다. 다시 생각해보면 우리 모두의 글쓰기 속에도 ‘어떤 것들을 지우기 위한 의지’가 반영되어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잊지 않으려 무언가를 기록하려고 할 때조차, ‘남겨두려는 의지’가 기어코 서 .. 2022. 10. 29.
도둑 러닝(2)_달리기 살림 2021. 10. 27 언제나 그렇듯 좋아하는 일을 하다보면 ‘왜 이 일을 하는가?’라는 물음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 가난한 프리랜서들의 공통 친구라고 할 수 있는 이 자기심문적인 질문은 자주 예고도 없이 초인종을 누르곤 한다. 한창 러닝에 빠져 있을 때 ‘왜 달리는가?’에 대해 자주 묻곤 했는데, 뾰족한 답을 구하진 못했다. 다만 이 메타화의 과정이 피로하지 않았고 다소 흥미진진한 모험처럼 생각되었다. 그런 이유로 나는 즐기는 맘으로 이 질문을 품고 지낼 수 있었는데, 볕도 좋고 바람도 좋은 10월의 어느 날, 벌판을 달리던 수만년전의 인류가 떠올랐다. 빠르진 않았지만 그 어떤 동물보다 오래 달릴 수 있던 인류의 뜀박질에 대해서 말이다. 수년전 1일 1식을 하는 동안 허기를 넘어선 ‘텅 빈 상태’가 잠.. 2022. 10. 27.
도둑 러닝(1) 2021. 4. 20 미루고 미루다가, 며칠을 벼르고 벼르다가 나왔다. 날이 많이 따뜻해져서 반바지를 입고 달렸다. 미루고 미룬 건 귀찮아서가 아니라 주치의라고 생각하는 한의원 선생님의 ‘땀을 흘리면 안 된다’는 단호한 처방을 어길 수가 없어서인데, 이성과 상식으론 납득이 되지 않는 처방이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말할 수도 없다. 러닝을 하면 아무래도 건강해지니 뛰고나면 좋다는 게 ‘상식’이지만 내 경우엔 달리고나면 건강을 걱정해야 할 판이니 이 속앓이는 누구와도 공유할 수가 없다. 그래서 나의 달리기는 일탈적인 성격이 강하다. (지난 겨울, 달리는 동안 자꾸만 오정희의 을 떠올렸던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요즘은 밤에 자고 아침에 일어나는 생활에 공을 들이고 있어서 대개 밤 10-11시쯤에 달렸던 것과 .. 2022. 10.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