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는 볼 수 없음429 작은 글씨로 그린 마음 무늬 2024. 6. 11스무살 무렵에 시도 잘 읽어내고 싶어서 애를 써서 자주 시집을 펼쳤다.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아서 읽고 또 읽기를 되풀이했는데, 대체로 이야기꼴을 갖추고 비유가 현란하지 않은 장정일이 쓴 시집 두 권이 좋은 길잡이 노릇을 했다. 군대에 잡혀가기 전에 다행히 시집을 여러 권 읽은 바 있어서 읽을 거리로 자리 잡혀 있었고, 뭔가를 읽을 짬이 없는 군대에선 짱박혀서 읽기엔 시집만한 게 없었다. 최전방 부대에 배치되어 1년 동안 GOP에 들어가 철책선을 지키는 일을 했는데, 나는 야간 근무를 서면서 졸거나 잔 적이 거의 없었다. 고참이 잠들면 건빵 주머니에 넣어둔 시집을 꺼내 읽거나 두 번 접어서 여덟 면으로 나뉜 편지지에 밑도 끝도 없는 편지를 썼다. 오늘 이오덕 어른이 펴낸 마지막 시집에.. 2024. 6. 11. 강을 따라, 깜빡이는 궤적을 따라 빨치산 투쟁과 디아스포라 서사를 축으로 삼아 정영선의 『아무것도 아닌 빛』을 읽어내는 건 자연스럽다. 그 때문에 노인 빈곤과 코로나 팬데믹으로 사회 관계망이 차단된 모습은 국가와 역사라는 대문자 이야기에 휩쓸려 압사당하거나 마모된 이들의 현재를 보여주는 소설의 배경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야기를 이끄는 ‘안재석’과 ‘조향자’가 품은 갖은 사연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아닌 빛』을 읽는 동안 눈길이 머물렀던 곳은 한때 맹렬하게 타올랐던 기억의 자리가 아니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텅 빈 곳들이었다. 낙동강 끝자락에 기댄 낡고 오래된 아파트는 어딘가로부터 떠밀려 온 사람들이 어울려 사는 곳이었지만 점점 비어 간다. 안재석과 조향자가 휩쓸렸던 기구한 행보를 누구도 관심 갖지 않았던 것처럼 떠난 이.. 2024. 6. 9. 작게 2024. 6. 8 며칠 동안 수업을 하기 어려울 정도로 가래가 끓고 목이 잠겼는데, 이렇다할 이유를 찾진 못했다. 이럴 때 몸과 마음을 더듬어보게 되는데, 적어도 일주일에서 길게는 한달치 정도는 챙길 수 있어야 하지 싶다. 먹고 자는 일, 마음 쓰고 생각한 것들를 차분히 챙긴다면 목이 잠긴 까닭을 알아차릴 수 있지 않을까 싶지만 어제 일도 가물거리는 형편이다. 나날이 나빠지는 게 아니라 천천히 나아지고 있어서 가볍게 뛰어봐야겠다 싶었다. 달리기가 이럴 때 몸과 마음에 어떻게 이바지 하는지 살펴보고도 싶고, 혹은 얼마나 훼방을 놓는지도 궁금해서 여느 때보다 조금 이른 시간에 나섰다. 달리다가 힘들다 싶으면 언제라도 멈추고 돌아갈 수 있는 ‘장림-다대포해수욕장’ 길이 나아보였지만 감천항을 끼고 달리고 싶어.. 2024. 6. 8. 작은 배움 / 한 숨 두 숨 2024. 5. 18 작은 배움꾸역꾸역 하는 습관이 내 몸과 마음을 힘들게 하고 망칠 수도 있다는 것을 쉬지 않고 오르막길을 모르면서 알게 되었다. 중간에 쉬는 사람들, 누워 있는 사람들, 가만히 서 있는 사람들을 보며 난 천천히라도 올라가야지, 난 빨리는 못 가더라도 쉬지 않고 가야지, 멈추지 않고 가야지라고 여겼지만, 한참을 올라가고 나니 그동안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고통에 붙들린다. 허벅지에 커다란 돌멩이가 두 개 들어가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내 몸은 이 정도 오르막길은 견뎌내지 못하구나. 그럴 때는 가만히 서서 혹은 한쪽에 비켜서 앉아서 쉬었다가 가야겠구나.오늘 나는 내 몸을 제대로 돌보지 못해서 몸을 힘들게 했지만 오늘 배운 것을 바탕으로 다음 번엔 더 잘 쉬어야겠다. ‘꾸역꾸역’이.. 2024. 6. 5. 일 하는 사람(1) 2024. 5. 18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수업을 하고 잠시도 쉬지 않고 차를 몰아서 강릉까지 왔다. 거리로 치자면 400km가 넘는데, 가까운 곳조차 차로 가보지 못했기에 여러모로 긴장이 되었지만 방법이 없어서 차를 몰고 먼 길을 가기로 결심했다. 포항을 지나고 울진 어귀에 이르렀을 때, 거리로 치자면 200km 정도 지났는데 그때 생각나는 사람이 있었다. 7~8년 전에 내 친구 세희가 늦은 밤 차를 몰고 우리 집에 놀러 온 적이 있었다. 그때 세희가 내게 이르기를 ‘일 마치자마자 너 보려고 쉬지도 않고 한 달음에 온 거야. 너가 너무 보고 싶어서’라고 했는데, 난 그게 세희 특유의 과장된 표현이라고 여기고 한 번 씩- 웃어주고 말았는데, 오전부터 오후까지 한숨도 쉬지 않고 일한 뒤에 곧장 강릉까지.. 2024. 6. 4. 조금씩 찬찬히 들여다보면 2024. 5. 610년 전쯤에 한 남자와 이야기를 나누다 조금 이상한 낌새를 느꼈는데, 내 말엔 대충 고개만 끄덕이는 것 같아 눈동자를 보니 내 얼굴 구석구석을 흘끔거리는 거였다. 그때 나는 이 사람은 내 얘기에 집중하지 않고 있구나 정도로만 여겼는데 요즘에 와서 그 남자가 왜 이야기 나누는 데 집중하지 않고 얼굴을 흘끔거렸는지 알 것도 같다. 거기에 숨은 뜻이 있다기보단 '그러기도 하는구나' 싶은 정도이지만 그걸 이제서야 알게 되었으니 생각지 못한 작은 작은 매듭 하나를 푼 느낌이다. *어떤 사람과 이야기를 나눌 땐 '고백'하려는 힘이 느껴져 애써 얼굴을 보지 않으려 할 때도 있지만 또 어떤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때때로 그저 얼굴을 들여다보고 싶어질 때가 있다는 걸 이제서야 어슴푸레 느낀다.. 2024. 5. 6. 셋! 2024. 2. 8 에서 세 번째 책을 펴냈다. 우린 우연히 만났지만 내 책장엔 오래전부터 최종규 작가님이 쓴 책으로 가득했다. 2023년부터 여러번 만나며(언제나 최종규 작가님이 부산으로 오셨다!) 서로가 일구는 텃밭에 대해, 걷는 오솔길에 대해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틀날 일어나 최종규 작가님을 만났던 어제를 떠올리면 따뜻한 봄볕이나 여름날 시원하게 내리는 빗줄기가 눈앞에 펼쳐졌고, 가을날 쏟아지는 햇살 같은 시간이었구나 싶었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말과 글을 모으고 손보고 갈래를 나누고 돌보기 때문에 그 작업을 쫓아갈 엄두도 나지 않지만 커다란 나무 그늘 아래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는 것처럼, 냇물에 발을 담그고 맑고 시원한 물살을 누리는 것처럼 책을 만들면 되겠구나 생각했다. 말과 글이 이어져.. 2024. 4. 20. 끈질기게 즐겁게 책이 가진 물성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치카와 사오가 쓴 (양윤옥 옮김, 허블, 2023)에서 “나는 종이책을 증오한다”(37쪽)는 대목과 이어진 내용을 읽으며 뜨끔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저 또한 눈을 반짝이며 열심히 밑줄을 쳤지만 ‘한결같이’ 이런 구절만 눈여겨보구나 싶은 생각도 들어 한구석이 찜찜하기도 했습니다. 생각지 못한 대목을 짚으며 다른 길을 낸다는 점에서 에 더 귀기울이고 싶지만 그게 장애인에 대한 새로운 정보값을 늘려가는 비장애인들의 ‘올바른(PC)’ 방식을 반복하고 있는 건 아닐까 싶더군요. 이 또한 문제될 게 없지만 가끔 이런 책을 접할 때만 잠시 놀라며 장애인에 대한 ‘생생한’ 정보값을 늘려가는 것으로 만족하는 도돌이표가 못마땅했습니다. 일본에서 1960년대 중반에 등장해 1970년대 .. 2024. 3. 31. 기지개를 켜듯 접힌 시간을 펼쳐 2023년 하반기 주제를 ‘가난이라는 주름’으로 묶어보았던 것은 알게 모르게 접어둔 것들을 펼쳐보면 좋겠다 싶어서였습니다. 다시 펼쳐봐야겠다 싶어 책 사이에 책갈피를 끼워두는 것처럼 기억을 접어두는 경우도 있지만 저마다가 놓인 형편 탓에, 또 갖은 이유로 접어두어야만 했던 것이 더 많지 않을까 싶어요. 스스로도 잊고 있던 접힌 기억을 펼쳐보는 자리를 가지면 좋지 않을까, 그런데 그 자리를 솔직한 고백만이 아니라 탐구와 탐색도 함께 하면 좋지 않을까 했습니다. 가난은 우리를 움츠려들게 만들고, 멈칫하게 하고, 뒷걸음질치게 하죠. 거기에 접힌 기억과 시간이 주름져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빈곤과 같은 뜻으로 쓰이는 가난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물질적인 것보다 심리적이고 정신적인 부분에 더 큰 영향을 주고 있다는.. 2024. 2. 24. 뒤쫓다-뒤따라가다-뒤에 서다-돌보다 ‘뒤쫓다’는 낱말을 앞에 놓아두고 이야기를 시작해볼까 해요. 국립국어원 표준대사전엔 ‘뒤-쫓다’를 “뒤를 따라 쫓다”와 “마구 쫓다”라고만 풀이되어 있습니다. 풀이말엔 나오지 않지만 ‘뒤쫓다’는 무언가를 바로 잡기 위해, (도망가는 무언가) 뒷덜미를 잡기 위해, (잘못된 무언가를) 바로 잡으려는 태도가 배어 있는 듯합니다. ‘바로 잡기’는 ‘손아귀로 움켜쥐는 일’과 이어져 있다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조금 다른 방식으로 이 낱말을 풀어볼 수 있지 싶어요. 뒤쫓는 건 바로 잡기 위해서라기보단 혹여나 ‘놓쳐버릴 수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어요. 놓쳐버리면 다시 찾을 수 없기 때문에, 무언가를 놓치지 않기 위해 애써 뒤를 쫓아 가는 것이겠지요. (바로) 잡기 위해서가 아니라 여깁니다. 그.. 2024. 1. 24. 이전 1 2 3 4 5 6 7 ··· 43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