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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하는 글쓰기43

<회복하는 글쓰기> Ⅱ. 삶을 가꾸는 '생활 칼럼' 쓰기(마감) 강좌소개 두번째 강좌에서는 함께 모여 자신만의 ‘칼럼’을 씁니다. 유명 인사나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동시대의 구성원이라면 누구나 생각하고 말하고 표현하고 싶은 것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전문적인 글쓰기처럼 보이지만 칼럼은 자신의 생각을 ‘조금 더 분명하게 표현’하거나 ‘조금의 근거를 더 마련해서 말하는 것’이기도 하니 누구라도, 언제라도 쓸 수 있는 글쓰기입니다. 6주간 어울려서 쓰게 될 ‘생활 칼럼’은 쓸수록 소외되는 글쓰기와 달리 각자가 가꾸고 있는 ‘생활’을 바탕으로, 쓰면서 알게 되는 영역을 반갑게 맞이하고 소중하게 나눌 수 있는 모두의 글쓰기입니다. 2018. 3. 14.
그 장소에(서) 정확하게 부는 바람 작년 겨울 초입에 발매된 최고은의 새앨범 (블루보이, 2017)을 겨우내 웅크리고 들었습니다. 몇번을 들었는데도 들을 때마다 숨죽일 수밖에 없었던 것은 놀라운 에너지와 집중으로 숨소리 하나까지 음으로 응집하고자 하는 최고은의 음악적 진지함에 압도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따금씩 차를 마시는 것 외엔 음반을 들으며 그 어떤 행위도 할 수 없었는데, 그건 진지하고 섬세한 사운드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그저 나 홀로 좋아했고, 그래서 더 애틋했던 한 뮤지션이 ‘저 너머’로 넘어가고 있는 뒷모습을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그이를 붙들 수 없었고 그렇다고 전처럼 똑같이 좋아할 수도 없었습니다. 좋아하되 그 좋아함을 모른척 지그시 내리누를 수 있을 때 곁의 사람을 동료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을 저는 어렴풋하게나마 알.. 2018. 2. 28.
부사(副詞)의 역사 한 때 제 몸으로 삶을 꾸려온 이들이 한없이 무기력해지는 것은 ‘늙음’이라는 생애사적 주기 때문도, 육체를 무너뜨리는 ‘질병’ 때문도 아니다. 늙음과 질병은 많은 원인들 중에 하나일 뿐이다. 누군가를 키우고 주변을 도우며 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아무 말 없는 ‘우두커니’가 되어버렸다. 김숨은 그런 사람들을 에 대해 이야기 하지만 그들이 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무기력하게 그 자리에 붙박혀 있는지에 대해선 별다른 설명을 하진 않는다. 질병(「간과 쓸개」)이나 유통기한이 다되었다는(「럭키슈퍼」) 간명한 설명 외엔 그들에 관해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은 별로 없다. 일 하는 사람에 관한 이력이 거의 제시되지 않는 걸 단지 소설적 설정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우두커니가 되어버린 사람들을 별다른 설명 없이.. 2018. 2. 21.
아무도 고백하지 않는 밤의 장소 2018. 1. 31 1. ‘터 놓고 말할 수 있는 관계’라는 구절을 새삼스레 매만졌던 밤은 한 친구의 ‘집들이’ 초대를 받았던 날이었다. 몹시 추운 날이었지만 아늑하고 따뜻한 보금자리에서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한동안 편안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던 그 저녁에 잊을 수 없는 특별함이 있었던 건 아니다. 다만 그곳에 모였던 사람들이 의도 없이 주고 받았던 선물이 매만져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온기처럼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터 놓고 말할 수 있는 관계’란 막연하게 편하다거나 언제라도 ‘고백’이 가능한 관계를 말하지 않는다. 차라리 편안함 속에서도 고백하지 않을 수 있는 관계에 가깝다. ‘터 놓는다’는 건 ‘터를 닦는 것’과 분리되지 않는다. ‘터 놓’고 말할 수 있는 관계’는 친밀성으로 쌓아올린 폐쇄적인 커뮤.. 2018. 1. 31.
회복하는 글쓰기 Ⅰ단편 소설과 함께 비평 쓰기(마감) 강좌 소개 모두가 글을 쓰고자 하지만 막상 시작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글쓰기를 지속하는 일은 더 어려운 일이지요. ‘매일매일 성실하게 조금씩 달라지는 것’이 글쓰기의 핵심입니다. 글쓰기는 나조차 모르는 ‘나’를 탐색하고 탐구하는 효과적인 활동이기도 합니다. '시작의 문턱'에서 매번 넘어졌던 글쓰기도 함께 읽고 쓴다면 서로에게 바통을 건네주는 계주처럼 힘껏 달리더라도 중도에 포기하지 않고 완주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글을 쓰다가) 힘들면 그 자리에 멈춰서도 됩니다. 함께 읽고 쓰고 있는 동료가 이어서 달릴 것이 틀림없으니까요. 동시대의 한국 소설가들의 특색 있는 단편 소설을 읽고 각자의 글을 써서 나누고자 합니다. 일상적인 에세이부터 비평에 이르기까지 글의 내용과 형식에 제한을 두지 않고 6주 동안, .. 2018. 1. 15.
곧 더 큰 파도가 온다면 2017. 11. 15 사박사박 시는 갈팡질팡이 아니라 사박사박 어딘가로 자기도 모르게 붙좇아가다가 뜻밖의 곳에 이르러 가지고 있던 것 내던지고 입고 있던 옷 다 벗어버리고 눈앞에 펼쳐진 바다로 뛰어드는 것. ―김연희, 『넷째의 집』, 꾸뽀몸모, 2017 사박사박은 어디에서 온 말일까? 누군가가, 무언가가 천천히 다가오는 소리일까? 어쩌면 아이가 자신의 입보다 큰 과일을 베어무는 소리일 수도 있겠다. 무엇보다 소리라기보단 몸짓에 가까운 기미를 감지할 수 있는 생활의 상태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생활의 귀’에 관해서 말이다. 아마도 시인은 오랫동안 갈팡질팡 했을 것이다. 생활에서도, 시 쓰기에서도 말이다. 사박사박은 갈팡질팡의 이력 속에서 얻게 된 감각이기도 하겠다. 나는 여기서도 ‘무용한 것의 쓸모’.. 2017. 11. 16.
삶을 가꾸는 생활글 쓰기 강좌(12강) 9월부터 '생활글 쓰기' 강좌를 진행하고 있다. 대안적인 인문학이나 연구자 재생산 기반에 대해 고민하던 시절엔 늘 대중 강좌 기획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했었는데, 돌이켜보니 대학 수업 외에 정작 대중 강좌를 진행한 이력이 그리 많지 않다. 친구인 '히요'가 제안해주어 아직은 조금 불편한 에서 12강의 강좌를 열게 되었다. 모임 구성원은 20대에서 50대 후반까지 다양한 연령대로 16명 가량 모였다.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의 여성의 분포도가 가장 높은데 대부분 직장을 마치자마자 서둘러 중앙동으로 오는 듯하다. 강좌명 중에 '삶을 가꾸는'이라는 표현은 이오덕 선생의 글귀에서 빌려온 것이고 '생활글 쓰기'는 70-80년대 한국 노동자들의 생활글 역사와 이어져 있다. 연초부터 진행해왔던 '한국 노동자 생활글.. 2017. 10. 27.
대피소 : 떠나온 이들의 주소지 2015. 11. 13 망한다는 것, 결별하고야 말게 될 것이라는 ‘그 말’에 대해 다시 이야기해야 함을 느낍니다. 그간 주변에 ‘글쓰기 모임’이 드물었다는 것이 ‘생활-글-쓰기 모임’의 고유성을 돋보이게 하는 조건이 아니라 차라리 ‘생활-글-쓰기 모임’이 자생하기 어려운 환경에 놓여 있음을 예감하며 이 모임 또한 결국 사라질 것이라는 말로 시작의 문을 열었었지요. 끝의 대한 예감으로 시작의 걸음을 내딛는 결기 속에 다소간 과장된 낭만의 뉘앙스도 느껴집니다. 그걸 무릅쓰고라도 다시금 환기할 필요가 있는 것은 그 시작을 망각하는 것은 이윤 축적을 목적으로 하는 모임이 아니라면 분명 타락의 징후이기 때문입니다. 이 모임을 ‘대피소’와 같은 곳이라 지칭했던 것도 기억하시리라 생각합니다. '생활-글-쓰기 모임'.. 2016. 1. 19.
해변이 남긴 무늬_이별례(7) _대마도의 어느 해변 2015. 5 전날 밤 태풍이 왔다고 했다. 사람들은 염려스러운 목소리로 간밤에 별일 없었냐고 물었지만 우린 괜찮았다. 비바람이 세차게 몰아친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게 태풍이라고 생각하진 못했다. 유난히 거세었던 그날의 비바람을 4인용 텐트가 막아주고 있었고 그 아래에서 우리는 깊은 잠을 잤다. 아침에 일어나 해변을 걸었다. 해변에 남겨진 거대한 무늬 위를 걷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건 간밤에 휘몰아친 태풍이 남긴 무늬일 것이다. 그리고 휩쓸려갔다가 다시 휩쓸려오기를 반복하며 끝내 휩쓸려가지 않고 남아 있는 해변에 모여 있는 모래들의 무늬일 것이다. 어딘가로부터 떠밀려온 작은 자갈의 무늬이기도 할 것이다.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흔적을 남기는 바람의 무늬이면서 저 멀리 달의 중.. 2016. 1. 16.
각자의 극단으로, 생활 스타일로―다시 ‘생활-글-쓰기 모임’을 시작하며 ‘극단적인 생활’이란 말에는 묘한 긴장감이 흐른다. ‘극단적’이라는 시한부의 뉘앙스를 품고 있는 관형사가 지속성을 담지하고 있는 ‘생활’이라는 명사와 좀처럼 어울리지 않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꼴이 어떤 것이라고 해도 ‘극단적인 것’ 또한 고유한 생활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분명 하나의 생활이지만 머지않아 파괴될 것을 예감할 수 있는 시한부 생활엔 ‘극단’과 ‘생활’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 ‘극단’이 극구 피해야 하는 생활의 감각처럼 여겨지는 것은 생활이란 무난하면서 평온하며, 반복할 수 있는 조건의 문턱이 낮아야만 성립하는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극단적인 생활’이란 당장은 가까스로 유지되고 있다고 해도 곧 무너져 내릴 것임을 예감할 수 있는 위태로운 상태를 가리킬 뿐이다. 이를 ‘생활’엔 .. 2015. 12.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