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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하는 글쓰기48

<생활-글-쓰기 모임> 4회 2015. 8. 4 design_yang 누군가의 편에 서서(2) 글쓰기와 발명하기‘쓰기’라는 행위를 앞에 두고 자꾸만 ‘살기’ 주위를 맴돌게 되는 것은 필시 무엇을 어떻게 써야 할지 종잡을 수 없기 때문이다. 무엇을 어떻게 써야할지 알 수 없음에도 무언가를 써야만 한다는 생각을 그러잡고 있는 일. 이 무용한 애씀 속에 ‘쓰기’의 이치가 있다. 이치는 기어코 도달해야 하는 목적지와 같은 것이 아니라 끝없이 채우고 보살피는 정성을 다한 노동을 통해서만 잠깐 품을 수 있는 ‘뜻’이자 ‘희망’일 따름이다. 글쓰기란 내 것일 수 없는 텃밭 앞에 쪼그리고 앉아 호미질을 하는 것이며 마찬가지로 내 것일 수만은 없는 커다란 짐을 기꺼이 지고 길을 떠나는 일이다. 글쓰기를 일러 고독의 시간 속에 머무르는 일이라고들 하.. 2015. 8. 7.
누군가의 편에 서서(1) 2015. 6. 23 익명의 액자공들 누군가의 글을 읽는 시간, 독자가 되는 시간. 나는 알고 있다. 독자의 시간이란 액자를 만드는 시간임을. ‘읽기’란 작은 액자를 만들어 그 글을 어딘가에 걸어두는 일이다. 수많은 작가들의 이름은 알고 있지만 ‘액자공’의 이름을 기억하는 이는 없다. 그럼에도 지금 이 순간, 어딘가에서 액자가 만들어지고 있다. 자신의 이름을 새기지 않고도 무언가를 감싸고 들어 올리는 노동이 계속되고 있다. 한 명의 작가가, 하나의 작품이 위대해질 수 있는 것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이름들이 그 작가와 작품을 울타리처럼 감싸고 있기 때문이다. 이름이 없어 부를 수 없는 액자공을 부를 수 있는 시간은 언제인가. 그 익명의 이름들이 작가와 작품의 이름 안에 감춰져 있다. 그런 이유로 누군가의.. 2015. 7. 30.
안심의 영주권 2015. 7. 23 임권택 영화를 향한 정성일의 변치 않는 열정적인 애정과 구애를 접하면서 감지했던 사실을 오즈 야스지로(小津安二郞)에 대한 하스미 시게히코(蓮實重彦)의 애도 섞인 헌정 속에서 다시 확인하게 된다. 대가(大家)를 다루고 있는 수많은 글들 중 읽는 이에게 감동으로 전해지는 것은 천재적인 위대함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아니라 지극히 평범하고 단순한 일상과 같은 부분에 밑줄을 칠 때라는 것을. 내게 ‘비범’이란 오직 일상과 생활이라는 ‘평범의 토양’에서만 길어올려지는 것이다. 그런 염원을 품고 현장에서 인용했던 오즈 야스지로 영화에 대한 하스미 시게이코의 표현은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안심하며 가슴을 쓸어내린다.” 빌린 책을 반납일에 쫓겨 급하게 읽으며 이 구절과 짧은.. 2015. 7. 24.
<생활-글-쓰기 모임> 3회 2015. 7. 21 design by yang 조금 이상한 그저 ‘외모’에 대한 인상이나 자기 생각으로 침윤된 ‘고백’에 기댄 대화 속에서라면 “당신은 조금 이상하군요”라는 말이 무척 이례적인 것으로 여겨질 것이 분명하다. 이 말은 비평은 커녕 손쉽게 비난으로 호도되어 정말인지 ‘이상한 사람’쯤으로 치부될 것임을 겪지 않아도 훤히 알 듯하다. 그런데 ‘당신은 조금 이상하군요’를 무례한 말이 아닌 무릅쓴 말이라 생각해볼 수는 없을까. 무례함을 무릅쓰면서까지 ‘당신의 이상함’을 알리고 있다면 관심을 ‘이상하다’는 규정이 아니라 이상함이 가리키고 있는 것으로 옮겨볼 수도 있을 듯하다. 의도야 어떻든 간에 타인을 향해 ‘이상하다’고 하는 것이 무례함을 범하는 일임을 모르지 않지만 우리가 타인에게 관심을 가지게.. 2015. 7. 22.
<생활-글-쓰기 모임> 2회 2015. 7. 7 design by yang 생활-외국어-번역 하기 1 작년 7월, 동료들과 팀을 이루어 독일 베를린에서 한 달 간 체류하며 공동 작업을 했었다. 처음으로 방문한 유럽이었지만 설렘의 시간은 잠깐이었고 서른이 훌쩍 넘은 이들과 함께 먹고 자며 이국땅에서 공동 작업을 한다는 것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종일 낯선 환경에 노출되어 있던 우리 모두는 급속도로 지쳐갔고 신경은 극도로 예민해졌지만 이를 악물고 참아내고 있었다.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 상황판단능력과 직관능력이 간난 아이 수준으로 떨어지는 것임을 몸으로 체험했던 힘든 시간 속에서 적어도 서로에게만큼은 싫은 소리를 하지 않기 위해 모두가 홀로 애썼던 시간을 기억한다. 슬픈 일이지만 그렇게 이를 악물고 끝까지 참았기에 우리는 .. 2015. 7. 10.
이별례(4)-기적과 지옥 2015. 7. 1 모든 만남은 재회(再會)다. 만남이 언제나 두 번째인 것은 헤어짐 없이는 그 어떤 만남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죽음을 염두에 두지 않는 삶이 빈껍데기이듯 이별없는 만남은 변덕일 뿐이다. 재회란 ‘우리는 언젠가 만난 적이 있다’라는 낭만적인 인연론에 기대어 있기보다 ‘우리는 언젠가 헤어진 적이 있다’는 서늘한 이별을 조건으로 한다. 다시 만났다는 것은 기적이면서 동시에 지옥이다. 더 이상 만날 수 없을 것 같았음에도 끝내 ‘다시’ 만났다는 것은 기적이지만 도리없이 ‘다시’ 만나버린 건 너와 내가 같은 곳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맴돎의 지옥이 아니고 또 무엇이겠는가. 만남이 떨림을 주된 정서로 하는 것은 지금 우리가 기적과 지옥 사이에 서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시) 만났으며 (다시) 헤.. 2015. 7. 1.
시작을 시작하기 2015. 6. 10 조금은 어색하게 이어져 있는 모임 이름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해볼까 합니다. ‘글쓰기 모임’이라고 해도될 걸 굳이 ‘생활글’이라고 하는 이유는 무엇이고 생활과 글을, 글과 쓰기를 떼어놓고 ‘-’로 잇고 있는 이유는 무얼까. 그 이유를 몰라도 문제될 건 없습니다만 이런 기회에 그리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를 조금 이어가보고 싶습니다. 지금은 거의 쓰지 않는 ‘생활글’이란 어휘는 역사를 가지고 있는 이름입니다. 1970년대를 기점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던 노동자들이 썼던 숱한 글들, 그리고 지금도 몸의 정직함으로 삶을 일구고 있는 곳곳에서 희미하게나마 이어지고 있는 글들, 조금은 미숙하고 조금은 거친 그 글들, 형식도 내용도 온전하지 못한 그 글들을 ‘생활글’이라 불러오고 있습니다. ‘생활글’.. 2015. 6. 28.
<생활-글-쓰기 모임> 1회 2015. 6. 23 design by yks 벼랑 끝의 생명을 살리는 일 오래된 의 낡고 벌어진 틈 사이에 길고양이 가족이 잠들어 있다. 다가가도 깨지 않고 이미 깨어 있는 고양조차 도망가지 않는 것은 미숙하고 둔하기 때문이 아니라 이 동네 사람들이 지금 잠들어 있는 고양이 가족을 키우고 있기 때문이다. 여러 세대가 살고 있는 아파트의 하부에 저런 알 수 없는 틈이 있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도시 하층민들과 노인들이 살고 있는 집 안에도 어쩌면 저런 틈이 있을런지도 모르겠다. 집이 없는 모든 것들이 잠깐이라도 쉴 수 있었던 곳은 ‘틈’이지 않았던가. 납득되지 않아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일 속에도 ‘살림’이 꾸려진다. 납득되지 않는 환경 속에서 누군가는 살아가고 그 살림이 또 누군가를 살린다.. 2015. 6.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