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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인용25

선생!(1) 2015. 11. 6 / 2016. 1. 4 “소설을 쓰는 것만으론 지루하지. 어떤 작가, 시인, 사상가를 정해 놓고 그 사람의 책, 그리고 그 사람에 관한 연구서를 3년 동안 계속해서 읽도록. 자네는 소설가가 될 것이니 전문 연구자가 될 필요는 없네. 그러니까 4년째엔 새로운 테마를 향해 나가도록 하게.” 저는 그 말씀대로 계속해왔습니다. 올 4월부터 열다섯 번째 3년째에 들어갑니다.-오에 겐자부로, 「아마추어 지식인」, 『회복하는 인간』(서은혜 옮김, 고즈윈, 2008, 77-78쪽) 시코쿠 에히메현에서 일곱 형제 중 다섯째로 태어난 오에 겐자부로는 고등학교 2학년 무렵 이와나미 신서로 나온 와타나베 가즈오의 책을 읽고 프랑스 문학을 전공하기로 결심한다. 그는 동경대에 진학 하여 와타나베 가즈오를 만.. 2016. 1. 4.
"언니야" 2015. 5. 31 "언니야. 나 월급 만 이천 칠백 이십원 탔어. 홍자네 4천원은 내가 인옥이네집에 가는 길에 가져다 줄게. 남은 돈 4천원은 여기 있어. 책가방 천원, 신발 5백원, 노트 백원, 양말 2백 50원, 인형 2백원, 외상값 34원, 봉투 50원, 내가 쓴 것은 이상이야. 인옥이네서 자고 내일 올게. 월요일부터 출근하래."―석정남, 1976년 3월 5일 일기, 「불타는 눈물」, 《대화》 1976. 10월. 석정남은 불꺼진 방에 들어서며 자신의 동생 이름을 부른다. '정숙아, 정숙아!' 방에 들어와 불을 켜보니 정숙이의 메모가 있다. 어디 갈 때는 반드시 메모를 해놓고 가라고 언니의 한 말을 잊지 않은 것이다. 동생 정숙이 언니에게 남긴 메모를 석정남은 자신의 일기장에 다시 옮겨 적었다. .. 2015. 5. 31.
녹아내리는 고리 2015. 5. 26 “저의 내면에는 굉장히 부화뇌동하는 성향이 있어요. 천성적으로 영향을 쉽게 받고 심하게 받는 사람, 특히 집단적인 것에 잘 휘둘리는 사람입니다. 만약 지금 이 순간 독일 청년 스무 명이 제 앞에서 나치스의 노래를 합창 한다면 제 영혼은 일부나마 당장 나치스가 될 거예요. 이건 아주 큰 약점이죠. 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겨 먹었습니다. 타고난 약점을 붙잡고 싸워봤자 쓸모없는 일이겠지요. 의무상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는 마치 약점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기 위해 자신을 채찍질해야 합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그러한 약점을 파악하고, 신중하게 고려하고, 잘 사용하고자 노력해야 하지요. 그런 약점도 모두 좋게 쓰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시몬 베유, 『신을 기다리며』, 이세진 옮김, 이제이북스,.. 2015. 5. 26.
단 한번의 계시 2015. 4. 20 키마이라는 그때 한 번밖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기술을 걸고 받는 자가 동일 인물이라도 신체의 자세가 다르고, 대응 방식이 다르고, 운동 속도가 다르면 '같은 키마이라'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것은 일기일회의, 그 순간에 태어났다 사라지는 일회성의 생명체인 것입니다. 따라서 어떤 '버릇'을 가진 것인지, 어떠한 '기능'을 갖춘 것인지, 어느 정도의 '성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인지 사전에는 알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이 끝난 뒤에 그 같은 일회성의 생명체로 한순간을 살았던 경험을 소급적으로 회상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것'과는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는 것이지요." ―우치다 타츠루, 『배움은 어리석을수록 좋다』(박재현 옮김, 샘터, 2015, 156쪽) 1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키마.. 2015. 4. 21.
무릅쓴 얼굴-절망하기(3) 2015. 4. 14 “역사는 군대가 아니다. 그것은 서둘러 옆걸음 치는 게이고, 돌을 마모시키는 부드러운 물방울이며, 수세기에 걸친 긴장을 깨뜨리는 지진이다. 때때로 한 사람이 어떤 운동의 영감이 되거나 그 사람의 말이 몇십 년 뒤 그렇게 되기도 한다. 그리고 때때로는 열정적인 몇 사람이 세상을 바꾼다. 때때로 그들이 거대한 운동을 촉발하여 몇백만이 참여하게된다. 그리고 때때로 그 몇백만을 똑같은 분노나 똑같은 이상이 뒤흔들면, 변화는 마치 날씨가 바뀌듯 우리를 덮친다. 이런 변화들의 공통점은 상상에서, 희망에서 시작된다는 것이다. 희망하는 것은 도박하는 것과 같다. 그것은 미래에, 당신의 욕망에, 열린 가슴과 불확실성이 암울함과 안정보다 나을 가능성에 거는 것이다. 희망하는 것은 위험하지만, 산다는 .. 2015. 4. 14.
"포동포동한 손"―엄마 시집(1) 2015. 3. 30 포동포동한 손 보드랍고 흰 손 뜨거운 밥알에 데인 손 우리 아기 손 우리 아기들의 손 내가 만져본 아기들의 손 ―김연희, 「손」 전문, 『엄마시집』, 꾸뽀몸모, 2013 포동포동한 손은 아마도 하늘에서 내려왔을 것이다. 천천히 조용히 그러나 틀림없이 내리는 눈송이처럼 포동포동한 손은, 만져도 만져도 포동포동하다는 촉감이 사라지지 않고 포동포동함이 점점 더 커지기만 하는 그 손은 축복인듯 슬픔인듯 보드랍고 하아얀 것이어서 내내 잡고만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살아 있음(生)의 의지를 피력하는 손, 그러나 삶의 의지를 피력하는 순간 그 손은 세상의 혹독함과 마주해야 한다. 그리하여 포동포동한 손은, 보드랍고 흰 손은, 붉은 손이 된다. 뜨거운 손이 된다. 그 붉고 뜨거운 손이, 생의 의.. 2015. 3. 31.
"배부른 꿈" 2015. 3. 29 "우리가 사는 이게 모두 꿈인지 몰라요. 그러나 꿈이더라도 깨우지는 마세요. 나는 지금 좋은 꿈을 꾸고 있어요. 여러분 모두 나와 같이 좋은 꿈을 꾸어봅시다." ―박영호, 『다석전기-류영모와 그의 시대』, 교양인, 2012, 81쪽. 이 땅에 천주교가 들어온지 112년이 되고 개신교가 들어온지 22년이 된 1905년 봄부터 류영모는 서울 연동교회 예배에 참석한다. 그 시절 선교사 게일의 설교를 잊지 않고 기억했다는 류영모의 기록을 권나무의 음악을 들으며 읽었다. "난 좋은 꿈을 꾸었네요"라는 소절이 돌아갈 수 없는 과거를 향한 처연한 감정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시 한번 그런 꿈을 꿀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담겨 있음을 알게 된다. '배부른 꿈'이란 얼마나 단순하고 놀라운 표현인.. 2015. 3. 29.
용접하는 '현장' 2015. 3. 18 “예수의 민중의 현장과 복음서를 쓰고 있는 사람의 현장이 유리가 안 됐다는 거지요. 즉 마르코는 지금 자기자신의 얘기를 울면서 쓰고 있다. 그런데 그것이 동시에 예수의 얘기다 그거예요. 그 현장이 아니었으면 예수에 대해서 그렇게 못썼을 거다 그거지요. 마르코 자신의 현장이 예수의 현장을 똑바로 보게했던 거죠. 우리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로 오늘의 현장이 텍스트의 그 현장을 보게 만든 거죠. 이것 없으면 저것이 안 보이는 거죠.” ―안병무, 『민중신학 이야기』, 한국신학연구소, 1990, 72쪽. '텍스트(성서)와 컨텍스트(현장)가 분리되지 않는다'는 안병무의 입장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대목. "우리가 역사 속에 속해 있으면 역사를 객관화할 수 없듯이, 내가 나의 컨텍스트에서 .. 2015. 3. 18.
마-알간 시 2015. 1. 21 당신의 아내 나는 당신의 아내가 나라는 걸 알아요 당신의 아내는 화를 잘 내지요 요리를 급하게 해치우곤 하지요 울었다가 금방 풀렸다가 하지요 나는 당신의 아내가 나라는 걸 알아요 당신이 나를 사랑한단 것도 내가 도무지 아내 역할을 잘 못한다는 것도 그치만 나는 당신 곁에 사는 사람 나는 당신과 살면서 나를 알아가지요 -김연희, 『작은 시집』, 꾸뽀몸모, 2015 섬광처럼 도착하는 것. 그것이 시의 본질이라 생각했다. 기다리고 기다리는 것, 서성이고 서성여야 하는 것, 시 안으로 성급히 들어가지 않고 그 앞에서, 그 주변에서 기웃거리거나 멀찌감치서 감탄하는 것. 그것이 시의 태도라고 생각했다. 기다림이 가닿을 수 없는 거리. 시의 진실이 그곳에 있다고 생각했다. 김연희의 『작은 시집』.. 2015. 1. 21.
숙련되지 않는 것들, 계속해야 하는 것들 2015. 1. 19 "40세에 첫 소설을 쓰고 나서 다시 40년 가까이를 더 살았으면서도 나는 내가 아직도 충분히 젊다고 생각하는데 그것도 이야기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젊다는 건 체력이나 용모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것을 좋다고 느길 수 있는 감수성과 옳고 그름을 분별할 줄 알고 옳지 못한 일에 분노하고 부조리에 고뇌할 수 있는 정신의 능력을 말하는데, 이런 정신의 탄력을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은 각자 사람에 다라 다르겠지만 나의 경우는 글쓰기가 아닌가 한다. 글 쓴 지 40년이 다 되지만 어떻게 된 게 이 노릇에는 숙련이라는 것이 없다. 숙련은 커녕 하면 할수록 더 어려워지는 게 이 노릇이다." ―박완서, 「이야기의 힘」, 『세상에 예쁜 것』, 마음산책, 2012. 29쪽 빨래를 널면서 김두.. 2015. 1.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