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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사람―회복하는 사람―다른 사람 2018. 12. 19 종종 모임을 녹음해왔고 몇년간은 그 목소리를 다시 들으며 글로 정리해 공유하기도 했다. 내 목소리를 (견디며) 듣고 불필요한 말버릇을 고치기 위해 애를 써본적도 있고 부재하는 이를 염두에 두며 녹음을 하기도 했다. 그간 녹음 파일을 달라고 요청하는 이가 적지 않았지만 그 파일을 끝까지(혹은 제대로) 듣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물었다. 자신이 있지 않았던 자리에서 나누었던 말들을, 기묘한 에너지가 교차하고 서로의 자아가 오르락내리락하는 그 혼란을 끝까지 듣는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대부분의 모임이 강의 형식이 아닌 참여하고 있는 여럿이 쉼 없이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방식인 탓에 쓸데 있는 말보다 쓸데가 없어보이는 말이 더 많을 수도 있다는 점에서 녹음 파일을 제대로 듣는다는.. 2018. 12. 19.
박민정의 두 번째 소설집(계속) 너는 듣거나 보지 못했겠지만, 선생은 종종 혼잣말을 했고 즐거운 상황들을 강박적으로 상상하다 히죽 웃곤 했다. 아카데미가 있는 동네를 벗어나면 선생은 고삐 풀린 것처럼 행동했다. 집 앞 카페에 앉아 공부를 할 때 증상은 심해졌다. 콧구멍에 손가락을 넣고 오랜 시간을 들여 천천히 후비는가 하면, 아이처럼 손가락을 빨아대기도 했고 머리카락을 뽑기도 했다. 선생은 어느 정도 자기 행동을 자각하고 있었다. 어린 시절 부모에게 상습적으로 구타를 당하던 때 그랬던 것처럼 일종의 틱 비슷한 증상이 시작됐다는 것도 물론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선생은 애써 자기 행동을 고치려 들지 않았다. 대학원생으로서, 시간강사로서, 입시 컨설턴트로서의 자신과 그 외의 자신을 구분하는 것만 잘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선생은 남들이 보지.. 2018. 12. 16.
종강_멸종 위기종이 사는 서식지 2018. 12. 11 “생존주의가 기본값으로 설정되어 있는 세상에서 ‘사라진다는 것’은 쉽게 ‘도태’나 ‘낙후’로 규정됩니다. ‘사라지는 것’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을 표하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그것으로부터 무언가를 배우는 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중요한 공부라고 하겠습니다. 무언가가 사라진다는 것은, 더 분명하게 말하자면 ‘멸종’한다는 것입니다. 떠나는 것도 아니고 밀려나는 것도 아닙니다. 어떤 종(種)이 깨끗하게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멸종이란 그 종이 살아가던 ‘서식지’가 파괴되었다는 말입니다. 다시 변주해서 강조하고 싶습니다. 로컬(local)이란 어떤 종이 살아가는 서식지입니다. 멸종 위기의 종들이 서식하는 곳이 오늘, 각자의 장소입니다. 로컬은 멸종 위기종들이 살아가고 있는 군락.. 2018. 12. 13.
말의 영점, 몸의 영점 2018. 11. 27 유난히 길었던 대학원 수업을 마치고 퇴근한 시간이 10시 반. 오늘도 무사히 지나갔구나라는 안도감보다 종일 뭔가 콱 막혀 있는 듯한 갑갑함을 견디는 게 쉽지 않다. 오늘은 종일 수업이 있는 날이고 그건 종일 노심초사 해야 한다는 것. 좀처럼 듣지 않고 끝내 말하지 않는 학생들을 두루 살피며 그럼에도 해야 할 말과 더는 할 수 없는 말들 사이를 줄타기 하듯, 어쩌면 줄다리기를 하듯 용을 쓰다가 탈출하는 마음으로 퇴근한 탓일까. 하루 이틀의 문제는 아니지만 오늘의 경색만큼은 털어내거나 뚫어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말차 한잔을 마신 뒤 달릴 채비를 하고 나선다. 가만 더듬어보면 말의 문제이지 않았던가. 매주 강의실은 말이 죽어나가는 것을 묵묵히 목격해야 하는 참담한 현장이지 않는가. 엇.. 2018. 12. 2.
문학의 곳간 50회_사치의 가계부를 쓰는 시간 _ 50회_김중미, 『꽃은 많을수록 좋다』(창비, 2016)_부산 중앙동 '한성1918'_2018. 11. 24 사치의 가계부를 쓰는 시간 늦은 아침을 지어먹고 어제 사람들과 사용했던 그릇들을 씻는 후 차를 내려 마시니 한낮의 빛이 서재를 가득 채운다. 초겨울 햇살에 평소엔 눈에 잘 띄지 않았던 먼지와 잡티(잔해물!)들이 눈에 밟혀 비질을 하니 다소간 상쾌하다. 늦은 새벽까지 ‘문학의 곳간’에서 나누었던 말을 되뇌이고 곱씹으며 혹여라도 놓치고 있는 건 없는가 염려하며 기록해야 할 것들의 목록을 헤아려보았지만 ‘그 순간’에만, ‘그 현장’(between)에서만 드러내는 장면(scene)이라는 것도 있지 않을까. 휩쓸리고 휩쓸려간 말들과 감정들을 애써 붙들어두기보단 저나름의 길을 가도록 잘 배웅하는 것도 필.. 2018. 11. 25.
매일매일 부서지면서 배우는 것 2018. 10. 11 저녁 7시에서 8시가 되면 하던 일을 정리해야 한다. 이제는 7시나 8시에 맞춰서 일을 진행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체육관에 가야 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군대 전역 이후로 제대로된 운동을 한번도 하지 않았지만(심지어 나는 군대에서도 족구나 축구를 한적이 없다) 지난 4월부터 거의 하루도 걸르지 않고 체육관을 나가고 있다. 뭔가 그럴 듯한 결심이 서서라기보단 어떤 끝을 향해 나아간다는 느낌으로, 출처를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조금은 강박적으로 체육관에 나가고 있다. 박사수료생이라는 (민망하고) 불안정한 신분과 1인 가족 생활의 적빈함이 누적된 탓도 없지 않을 것이다. 나는 별안간 꽤 과격한 운동을 시작했고 6개월 간 지속하고 있다. 십 수년만에 몸을 쓰다보니 아프지 않은 곳이 없다.. 2018. 10. 12.
회복하는 글쓰기 : 다시 시작하는 생활의 장르 아무리 힘을 내어봐도 ‘어쩔 수 없는’ 세계에서 정처없이 흔들리고 흐트러지면서도 끝까지, 똑바로 걸어나가고자 했던 일본 전후(戰後) 여성들의 삶을 ‘고유한 세계’로 구축해나간 감독, 나루세 미키오. 결혼을 네 번이나 해야 했던 기구한 운명의 한 여성이 보살폈던 가족의 모습을 담은 1952년작 의 마지막 시퀀스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보고 싶다. 3녀 1남의 남매 모두 아버지가 달랐던 이유는 혼자 힘만으론 자식들을 키워낼 수 없었던 전후의 궁핍한 환경 때문이었다. 막내 딸 기요코(다카미네 히데코)는 무능력한 오빠와 허영에 찬 언니들, 아둔하고 어리석게만 보이는 엄마로부터 벗어나 자신만의 삶을 꾸리고자 버스 차장으로 일하며 독립한다. 며칠동안 집에 들어오지 않는 미츠코(둘째 언니)의 소식을 묻기 위해 기요코의.. 2018. 10. 7.
꿈-기록(3) 0.1%의 희망 2018. 9. 12 점심을 지어 먹고 잠깐 선잠이 들었는데, 간만에 꿈을 꾸었다. 내가 누군가에게 링 위에서 잽(jab)을 내는 방법을 가르치고 있는 꿈이었다. 늦봄부터 나가기 시작한 체육관에서 운동을 가르친다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운 것임을 알게 되었다. 기본 원리를 숙지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자신의 몸으로 깨닫지 않으면 안 된다. 몸을 움직여 반복연습하다보면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게 있다. 쉽게 익힐 수 없다는 것, 그러나 아주 느리게 조금씩 나아진다는 것을. 5개월 동안 중요한 일이 아니고선 좀처럼 체육관 나가는 것을 빠지지 않았다. 운동을 하고 나면 1kg이 빠졌다. 제대로된 잽(jab)을 넣기 위해 매일매일 숨이 턱 밑까지 찬다. 아무것도 아닌 잽(jab)을 .. 2018. 9. 19.
영화가 건넨 선물Cinematic Present(1) 뒤돌아본 얼굴 ⓒ (최아름, 2012) 학창 시절 내내 '완무'(조현철 분)의 뒷모습만 봐야 했던 '영아'(김고은 분)를 뒤돌아보는 장면. 완무는 어쩌면 저 순간 처음으로 영아가 있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을지도 모른다. 감정적인 동요를 금지하고 있는 듯한 덤덤한 정조로 흐르는 를 거듭 관람하다보면 '입을 틀어막고 우는 울음'(이성복)조차 낼 수 없는 슬픔의 정서가 곳곳에 배어 있음을 알게 된다. 미안하다고 말할 수도 없는 미안함 앞에서 최아름은 얼굴을 마주보지 못한 채 (그런 이유로 충분하지 못한) 미안함을 전하지만 채울 수 없는 관계의 빈자리에 영아조차 모르는 (영화) 선물을 놓아둔다. '거기가 니 자리야?'라고 물으며 돌아보는 완무의 얼굴 또한 이제는 이 세상을 떠나고 없는 영아에게 보내는 작은 선물이다. 2018. 7. 14.
중심을 이동 하는 운동 : 생활, 모임, 글쓰기 선물 받은 강좌 포스터를 마치 마패라도 되는 양 당당하게 쥐고 오르막길을 오른다. 한참을 올라도 숨이 차지 않으면 체력이 올라와 있다는 것이어서, 숨이 차면 숨이 차는 대로 운동이 되고 있다는 신호이니 어느 쪽이어도 만족스럽다. 다용도실엔 여름 내내 마실 수 있을 정도의 물이 쟁여져 있지만 오늘 같은 날은 무거운 생수 묶음을 사들고 퇴근하고 싶다. 특별히 의도한 건 아니어도 2리터 생수 6개 묶음과 쌀 만큼은 인터넷 쇼핑이나 배달을 이용하지 않는다. 택배 기사님들이나 배달하시는 분들의 노동 강도를 더하지 말자는 생각도 있지만 무엇보다 ‘필수품만큼은 내 손으로’라는 생활 슬로건을 나도 모르고 읊조리게 되었던 터라 미련해보이거나 궁색해보일 것을 알면서도 낑낑거리며 오르막길을 오르곤 한다. 한달여만에 다시 재.. 2018. 6.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