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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지기52

단 하나의 문장도 홀로 쓰는 것이 아니다 1. 관통당하다 : 죽음과 말 손바닥 위의 모래처럼, 아니 손바닥을 스치고 지나가버리는 돌이킬 수 없는 강물처럼 시간은 언제나 인간을 빠져나간다. ‘빠져나간다는 것’은 정확히 말해 ‘관통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은 좀처럼 제 자신을 내어주지 않지만 시간만은 인간을 뚫고 지나간다. 시간은 인간을 관통한다. 인간이 죽음에 이르게 되는 것은 시간에 관통당하기 때문이다. 시간의 관통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시간이 화살처럼 인간을 뚫고 지나갈 때 개별 존재는 자신의 유한성에 대해 자각하게 된다. 인간의 ‘자각’이 ‘관통「당」하는 순간’에만 찾아온다는 것을 상기해보라. 어떤 자각인가? 인간이란 ‘죽음 앞의 존재’에 다름 아니라는 사실, 그것은 시간의 관통을 피할 수 없다는 존재의 겸허함을 가리킨다. ‘자각’이란.. 2012. 3. 23.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 '얼굴' 이제는 통용되지 않는 이야기가 되어버렸지만 자신의 출생지가 ‘다리 밑’이나 ‘육교 아래’라는 ‘사실’을 알고 격심한 혼란을 겪던 세대가 있었다. ‘아이’가 어떻게 생겨나는지 ‘설명’할 수 없던 시절, ‘다리 밑’과 ‘육교 아래’는 성교육을 대신할 수 있는 탁월한 구조물이기도 했고 동시에 아이를 길들이는 ‘훈육의 공간’이기도 했다. ‘다리[육교] 밑’에서 아이를 주어왔다는 시쳇말은 인류의 저 오래된 ‘출생 서사’를 변주한 것이겠지만 한편으론 도시의 급속한 인구 팽창 현상으로부터 파생된 이야기처럼 보이기도 한다. ‘다리[육교]’는 도시의 관문이기도 하고 도시를 가로지르기도 한다. 그러니 밖에서 오는 ‘아이’와 ‘유이민’들은 모두 ‘다리[육교] 밑’에서 온 것이지 않을까. 근래 들어 육교가 많이 사라지고 있는.. 2012. 3. 8.
작은 것들의 정치 : 오늘, 우리는 '급진적 정치'라는 '야동'을 끊을 수 있는가? 1. '정치적인 것'이라는 '포르노그라피' 우연한 계기로 몇몇의 사람들과 한 권을 책을 같이 읽게 되었습니다. 특출나지는 않지만 이야기할 거리가 풍부한 책을 선정해야했기에 선택한 것이 제프리 골드파브의 (이충훈 옮김, 후마니타스, 2011)입니다. 책을 읽으면서 파생된 단상들을 거칠게 기록해보았습니다. 서둘러 말한다면 는 별다른 감흥을 느낄 수 없는 책이었습니다만, 외려 감흥을 느낄 수 없다는 그 사실이 슬며시 보여주는 대목들에 집중해보고 싶었습니다. 말 그대로 '단상'들에 불과하지만 천천히 그 단상들에 논리를 만들어 갔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습니다. 책의 제목과 심플한 디자인이 주는 기대와는 다소 다른 전형적인(?) 사회과학 서적이었던 탓에 생각만큼 활발한 논의를 교환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바로.. 2011. 11. 24.
어두운 시대의 '어휘'들 더 어두워졌다. 한 시대의 어둠을 막아내는 것의 어려움보다 ‘어둠’을 감지하는 감각이 점점 무뎌지고 있기에, 앞으로 더 어두워질 것이다. ‘어둠’을 감지하는 감각의 퇴화는 우리의 삶이 자본이라는 환등상(Phantasmagoria)이 제시하는 길만을 좇고 있다는 것에 대한 반증이다. 이전보다 살기 더 편해지지 않았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다. 왜 밝은 것들은 보지 않고 어두운 것만 보냐고 힐날할지도 모르겠다. 어둠 쪽으로 몸이 기우는 것, 아픈 곳에 자꾸 손이 가는 것은 아마도 ‘문학이라는 병’을 여전히 앓고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그 병이 자꾸만 무언가를 하게 한다. 읽고 쓰고 만나게 한다. 그러나 그 힘이 너무도 미약한 탓에 온통 사라지는 것 투성이다. 문학도, 사랑도, 당신도 점점 더 어두워지고 있다. .. 2011. 11. 19.
존재의 조건 : 공명(共鳴)―공동(共同)―공생(共生) 1. 구덩이에 빠지다 산다는 것은 구덩이에 빠지는 일과 같다. 그것은 우리들의 삶이 나락으로 떨어지거나 진창을 구르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구덩이에 빠진다는 것은 개인의 실착이나 체제의 함정을 가리키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삶의 자리 혹은 삶의 영역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삶이란 ‘예측할 수 없음’을 조건으로 할 때 비로소 제 모습을 드러낸다는 점을 상기해볼 때 구덩이에 빠진다는 것은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삶의 형식과 닮아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다. 우리들은 무언가를 쫓고, 쟁취하고, 추구하는 데서 삶의 동력을 찾곤 하지만 실은 무언가에 사로잡힐 때 비로소 살아 있음을 느끼게 된다. 구덩이에 빠진다는 것은 무언가에 사로잡힌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바로 그것이 삶의 패턴을 설명하는 데 활용되곤 하.. 2011. 11. 16.
하나의 장르, 바로 그 한 사람(2) '후일담'은 없고 '손버릇'만 남다 김일두의 첫 솔로 앨범은 "손버릇 그대로" 뜯어낸 음악이다. 몸에 각인된 '버릇'을 애써 감추지 않기 때문일까? 그의 노랫말은 솔직하고 대범하다는 평이 뒤따르곤 한다. 뮤지션 김일두에게 있어 "손버릇"은 미적인 것도, 예술혼(spirit)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차라리 그것은 삶의 방식이라고 하는 것이 더 걸맞겠다. 그의 음악은 그저 "좋을 때는 좋은 영향을 받고, 안 좋을 땐 안 좋은 영향을 받으"며 지내는 생활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이기에 삶이 직조해내는 것이라고 해도 좋을 듯하다. 문화 불모지 부산에서 인디음악을 10년간 지속해온 궤적을 묻는 질문에 그저 덤덤한 반성과 지금-함께 하고 있는 관계의 기쁨으로 응답한다. 힘겹게 건너왔을 그 10년의 시간 속에 흔히 기.. 2011. 11. 12.
하나의 장르, 바로 그 한 사람 대중문화와 예술, 인문학과 사회과학에 이르기까지 저마다 ‘별미’를 찾기 위해 애를 쓰지만 막상 ‘별종’을 만나게 되면 태도가 돌변하곤 한다. 그 돌변의 자리가 가리키는 중요한 사실 중의 하나는 ‘별미’란 내 입맛(욕망)을 자극하는, ‘익숙하지만 새로운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반면에 ‘별종’이란 이해하거나 파악하기 힘들뿐만 아니라 장악할 수 없기에 매번 존재 그 자체로 내게 육박해 들어오는 어떤 위협으로 감지된다. 하여, ‘별종’들은 ‘보습 대일 땅이 없고’ 스스로를 증명할 상징질서도 희박하다. 사정이 이러하기에 ‘별종’들은 ‘별미’라는 장애물, 더 정확하게 말해 ‘작은 차이들의 나르시시즘’을 원리로 하는 자본제적 (가치) 체계가 구축해 놓은 강력한 질서로 인해 대중들과 만날 수 있는 기회마저도 박탈당.. 2011. 9. 21.
어떤 ‘Kid’의 종언―보수동 헌책방 골목에서의 슬픈 기쁨 대학에 다니던 시절, 내겐 유별난 ‘취미’가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책의 서문을 섭렵하는 것이었다. 선배와 선생 없이 오래된 서가를 헤집고 다니며 수많은 책들의 서문을 읽느라 하루를 다 소진하곤 했다. 수줍은 고백으로 채워진 서문은 알 수 없는 문장들로 빼곡한 어려운 책을 친근하게 만들어주었고 비장어린 선언문과 같은 서문을 읽으면 마치 공동 저자라도 되는 냥 함께 달뜨곤 했던 것이다. 책의 서문을 읽으며 마음과 몸이 동뜨는 것은 필시 예비 문사의 허영에 가까운 것이었을 테지만 새로운 세계, 혹은 새로운 말들과의 첫 만남이 주는 설렘과 기쁨만큼은 숨길 수 없는 것! ‘세계의 본문’을 예감하고 직감할 수 있는 교량이기도 했던, 그 시절 읽었던 책의 서문들이야말로 내게 ‘문학적인 것’에 다름 아니었던 셈이다. .. 2011. 9. 20.
생존의 비용 : 지우는 글쓰기와 장르 문법 “나는 달로 간 사람의 이야기를 알고 있다.”(한유주, 「달로」, , 문학과지성사, 2006, 8쪽)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소설이 있다. 그런 문장을 첫 번째 소설집의 첫 번째 문장으로 기입했어야만 한 소설가가 있다. 그리고 그는 언제나 ‘세계의 뒷면’, 다시 말해 ‘말의 뒷면’을 검질기게 파고들었다. 한유주의 소설이 언제나 죽음의 언저리를 배회하고 있는 것은 그가 놓여 있는 세계의 한켠이 죽음에 반쯤 잠겨 있거나 그의 글이 한쪽 발을 죽음 강에 담그고 있을 때만 씌어질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세계의 뒷면에 가닿으려고 하는 것은 세계의 앞면은 이미 붕괴해버렸거나(“겉장이 달아나고 없는 세계”, 「죽음의 푸가」, , 44쪽) 극심하게 오염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한유주는 이러한 세계에서 쓴다는 것은 .. 2011. 8. 27.
존재론-비평론-공동체론이라는 보로메오 고리―김영민, <<비평의 숲과 동무공동체>>(한겨레출판사, 2011) 사람들은 그를 기다리고 있다. 그의 친구[동무]들은 그를 기다리고 있다. 그의 적들도 그를 기다리고 있다. ―롤랑 바르트, (김웅권 옮김, 동문선, 2006, 41쪽. [ ]는 인용자 삽입) ‘안다는 것’은 필시 ‘비용’을 요구한다. 그 비용이란 앎에 다가서기 위해 행한 ‘나의 노력’ 따위들만으로는 치를 수 없는 성질의 것인데, 그것의 요체는 바로 ‘돌이킬 수 없다는 사실’에 있다(“좋든 나쁘든, 안다는 것은 ‘돌이킬 수 없는’ 짓이다.”*). 이 돌이킬 수 없음은 비단 ‘앎’의 문제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어휘의 문제와도, 생활양식의 문제와도, 공동체의 문제와도, ‘새로운 의욕’의 문제와도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것일 수밖에 없다. 김영민의 글을 ‘읽는다는 것’ 또한 ‘돌이킬 수 없는 것’에 가깝다.. 2011. 8.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