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는 볼 수 없음428 생활이라는 부사 2015. 5. 4 잠깐, 하는 사이에 놓쳐버렸다. 놓친 것을 다시 잡기 위해 뒤쫓다가 잠시, 길을 잃었다. 붙들 수 없는 것을 붙잡으려는 애씀에 기댈 때 일상이 겨우 지켜진다. 까치발을 세워 잠시 넘어다보는 것이 일상이다. 그러니 일상은 놓치는 것 투성이이자 너머를 볼 수 없는 담벼락으로 둘러싸여 있다. 깜빡하고 잠들어버렸을지라도 이내 깨어나는 것처럼, 그라운드를 누비는 선수라면 실수로 공을 놓쳤더라도 다음 번엔 당연히 그 공을 잡을 수 있다 믿어야 한다. 생활인(生活人)이 일상을 대하는 태도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숱한 한계와 실수를 마주하는 일이 바로 '생활'이다. 생활을 잘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성과 없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한계와 실수'를 제대로 마주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잠깐과 .. 2015. 5. 5. 다행(多幸)-절망하기(5) 2015. 4. 21 외출했다 집으로 돌아오니 정전되어 있었다. 밥통을 열고 밥을 만져보았다. 온기가 거의 남아 있지 않은 걸보니 전원이 내려간지 3-4시간은 지난 듯하다. 초를 찾아 불을 붙였다. 심지가 안으로 말려 들어가 있어 불이 붙지 않았다. 오랫동안 불을 쬐어 초를 녹였다. 심지가 보이지 않았다. 심지를 찾을 수 없는 초, 어쩌면 심지가 뽑혀 있던 초. 냉장고에 넣어둔 식재료들이 상하겠다는 생각 때문에 속상했다. 공사 인부들이 오전부터 건물 외벽을 청소하느라 종일 물을 뿌려대던데, 아마도 그 여파로 누전이 된 게 아닐까 생각하니 더 속상했다. 어둠 속에서 잠시 발을 굴렸다. 여기 저기 수소문 한 뒤 '정전 시 대처 방법'에 따라 콘센트를 뽑고 하나 하나 확인하며 다시 켜보았다. 문제는 1층 어딘.. 2015. 4. 22. 단 한번의 계시 2015. 4. 20 키마이라는 그때 한 번밖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기술을 걸고 받는 자가 동일 인물이라도 신체의 자세가 다르고, 대응 방식이 다르고, 운동 속도가 다르면 '같은 키마이라'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것은 일기일회의, 그 순간에 태어났다 사라지는 일회성의 생명체인 것입니다. 따라서 어떤 '버릇'을 가진 것인지, 어떠한 '기능'을 갖춘 것인지, 어느 정도의 '성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인지 사전에는 알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이 끝난 뒤에 그 같은 일회성의 생명체로 한순간을 살았던 경험을 소급적으로 회상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것'과는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는 것이지요." ―우치다 타츠루, 『배움은 어리석을수록 좋다』(박재현 옮김, 샘터, 2015, 156쪽) 1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키마.. 2015. 4. 21. 도서관에서 만난 사람(2)-성문 앞에서 2015. 4. 19 시립 도서관을 빼곡이 메운 사람들의 틈바구니에서 잠깐 고개를 들어 눈을 감고 생각한다. 나는 지금 어떤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인가. 아무런 욕망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표정을 짓고 있는 이들은 도대체 누구인가? 움직임이 최소화되어 있는 사람, 산을 오르는 등반가처럼 환경에 예민한 사람, 생존을 위한 필수품을 챙기듯 하루 하루 자신에게 꼭 필요한 것들을 빠짐없이 챙겨 정해진 시간에 도착해서 정해진 시간에 떠나는 사람. ‘시험’을 준비하는 사람이란 이제 특별할 게 없는 평범한 이들 중 하나일 뿐이다. 더 멀리 뛰기 위해 오래도록 움츠리고 있는 사람들. 별다른 목적 없이 올라온 도서관에서 각자의 도약을 준비하고 있는 사람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괴이한 열기에 휩싸이기도 한다. 백지(수표)처럼 .. 2015. 4. 19. 다음 날 2015. 4. 17 ‘다음 날’은 돌이킬 수 없는 무력한 날의 모습으로 도착한다. 그런 다음, ‘다음 날’은 무너져버린 바로 그 날을 일으켜 세워야 하는 명령으로 거듭 도착 한다. 비극 다음 날, 우리는 아직 무사하다는 안도감이 아닌 더 큰 비극이 오고 있음을 예감해야 한다. 하여, ‘다음 날 ’ 우리는 슬픔을 어금니로 물고 다시 물어야 한다. 서둘러 폐쇄된 문으로 다가서야 한다. 더 큰 비극이 우리를 덮칠 것이다. ‘다음 날’은 우리를 심문하고 심판하는 날이기도 하다. 구조 요청에 응답 하기를 실패한 다음 날은 우리가 구조 요청을 해야 하는 날이기도 하다. 다음 날은 구조 요청을 해야 하는 날이면서 실패했던 구조 요청에 다시 실패할 수도 있는 날이다. 다음 날은 구조 요청이 계속 되는 날이다. 구조 .. 2015. 4. 19. 오늘 각자의 윤리-절망하기(4) 2015. 4. 16 2015년, 다시 돌아온 4월16일. 영영 돌아오지 못한 이들을 잠깐 머금는 기일(忌日). 금식(禁食)하다. 음악을 듣지 않고, 소리내어 웃지 않고, 누구에게도 연락하지 않았다. 상복을 갖춰 입고 종일 벗지 않았다. 유별난 일도, 유의미한 일도 아님을 알면서 무용한 애도를 했다. 홀로 무용함의 목록을 늘려가는 일, 아니 채워가는 일에 집중해보았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기껏 내가 할 수 있는 애도가 '하기’(행위)가 아니라 '하지 않기’(금지)의 방법에 기대고 있음을. 하지 않음으로써 하기. 그런 것에 머물러 있어도 괜찮은 것일까. 네 시간 수업을 했고 조금 읽고 겨우 메모 했다. 글쓰기 또한 '하지 않음으로써의 하기'임을 선명하게 알게 된다. 무용함을 조건으로 하고 있는 일들의 목.. 2015. 4. 17. 무릅쓴 얼굴-절망하기(3) 2015. 4. 14 “역사는 군대가 아니다. 그것은 서둘러 옆걸음 치는 게이고, 돌을 마모시키는 부드러운 물방울이며, 수세기에 걸친 긴장을 깨뜨리는 지진이다. 때때로 한 사람이 어떤 운동의 영감이 되거나 그 사람의 말이 몇십 년 뒤 그렇게 되기도 한다. 그리고 때때로는 열정적인 몇 사람이 세상을 바꾼다. 때때로 그들이 거대한 운동을 촉발하여 몇백만이 참여하게된다. 그리고 때때로 그 몇백만을 똑같은 분노나 똑같은 이상이 뒤흔들면, 변화는 마치 날씨가 바뀌듯 우리를 덮친다. 이런 변화들의 공통점은 상상에서, 희망에서 시작된다는 것이다. 희망하는 것은 도박하는 것과 같다. 그것은 미래에, 당신의 욕망에, 열린 가슴과 불확실성이 암울함과 안정보다 나을 가능성에 거는 것이다. 희망하는 것은 위험하지만, 산다는 .. 2015. 4. 14. "백판거사(柏板居士)"-절망하기(2) 2015. 4. 11 류영모는 잣나무로 만든 널판을 안방 윗목에다 들여놓고 낮에는 방석 삼아 그 위에 앉아 있고 밤에는 침대 삼아 그 위에서 잤다. 사람들이 류영모의 집에 찾아가 널판 위에 꿇어앉아 있는 류영모의 모습을 보고는 죽은 이가 다시 살아나 칠성판 위에 있는 것 같아 섬뜩한 느낌이 든다고 하였다. 안방에 널판을 들여다놓고 그 위에서 40년 동안이나 산 이는 일류 역사에 류영모가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이다. 류영모가 앉고 누운 잣나무 널판은 상가(喪家)에서 쓰는 널감이었다. (중략) 류영모가 쓴 잣나무 널판의 두께를 재어보니 3치(약 9센티미터)이고, 폭은 3자(약 90센티미터), 길이는 7자(약 210센티미터)였다. 류영모가 널판 위에 사는 전무후무한 기행을 한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2015. 4. 12. 절망하기(1) 2015. 4. 10 꽃 진 아침, 눈을 뜨자마자 ‘절망’이라는 단어만이 텅 빈 방에 오롯하다. 어째서 ‘절망’인 것일까. 이 생생한 오롯함의 정체는 무엇인가. 숨죽이고 생각하다 처연히 고요해진다. 절망한다는 것. 바라던 것(望)을 버려야만 하는 일(絶), 희망이 끊어지는 것은, 희망을 단념하는 것은 무자비한 일이다. 그런데 절망은 누구에게나 아무 때고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바라던 것을 단념하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며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절망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는 것’이라는 점을 새삼 환기하면서 나는 눈을 뜨자마자 대면해야만 했던 이 생경한 감정을 한켠으로 밀쳐낼 수도, 애써 외면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곧장 물어야만 했다. 절망이 ‘의지’일 수 있을까. 절망.. 2015. 4. 10. 투명한 웃음들 2014. 6 보수동 책방골목_shot by 허탐정 2015. 4. 7. 이전 1 ··· 23 24 25 26 27 28 29 ··· 43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