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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일찍 쓰인 글 2015. 3. 16 더딘 문장 앞에서 자꾸만 몸이 무너져내리는 이유. 무거운 추를 몸에 이고 달리는 사람, 그러나 그 추의 무게를 짐작조차 하지 못하는 순진하고 절망적인 러너는 가벼운 발놀림만을 믿고 호기롭게 달려나가지만 어딘가에 들러 붙어 있는 추 탓에 도무지 무게 중심이 잡히지 않아 이내 고꾸라지고 마는 것이다. 백지 위를 가로질러 달려나간다는 것, 글쓰기가 자신도 모르는 추를 짊어지고 달리는 일과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도망치듯 달려나가는 가쁜 걸음을 닮은 문장들을 떠올려본다. 무너지고 앞으로 고꾸라지는 몸을 다시 일으켜 세워 한 발 한 발 더디게 걷는 일이 무너지고 고꾸라지는 일을 배우는 것과 다르지 않은 일인지도 모르겠다. 무너짐과 고꾸라짐도 배움일 수 있다면 그것은 글쓰기의 의욕과 사명감.. 2015. 3. 16.
<문학의 곳간> 2015년 상반기 ------ 2015년 상반기 안내 ---------- 2월 부터 6월까지 에서 함께 읽을 책 리스트가 나왔습니다. 이번 은 한국 소설, 해외 소설, 시, 인문학 등 조금 더 다양한 범위의 책들을 선정해보았습니다. 겨울의 끝에서 초여름까지 한달에 한번, 문학 작품을 함께 읽고 나눌 수 있는 자리이니, 함께 곳간을 열어주시면 좋겠습니다. 올해에도 이어지는 을 통해 각자가 보살펴온 이력을 잘 나눈다면 사귐 속에서 서로의 자리를 비추는 작은 등불을 켤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일시: 2월 28일~ 6월 27일, 매달 마지막주 토요일(3월만 셋째주 토요일입니다) -시간: 오후 3시 -장소: 미정 (추후 공지할 예정입니다) 참여비: 5회 신청시 4만원, 1회 1만원 입금처: 101-2013-2486-06 (생활.. 2015. 2. 16.
다시 만나 같이 살기 위해 2015. 2. 14 새벽, 인터넷으로 구매한 책들 사이에 끼어온 『금요일엔 돌아오렴』(4.16 세월호 참사 시민기록위원회 작가기록단, 창비, 2015)의 한 챕터를 읽으며 한참을 울었다. 흘러내리는 눈물은 내 힘으로 막을 수 있는 게 아니었고 그렇다고 읽기를 멈출 수도 없었다. 수첩과 같은 형태로 배송된 짧은 글뭉치는 내게 눈물을 흘린다는 게 슬픔이 최고도로 유지된 상태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운다는 것이 특별한 일이거나 감춰진 진실이 드러나는 순간과 별다른 관련이 없다는 것, 어쩌면 웃음처럼 일상적인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우린 다만 웃을 뿐 우는 데 인색할 따름인지도 모른다. 눈물은 언제나 무언가를 고백할 때나 진정성 따위를 증명할 때만 동원될 뿐이다. 오직 나에게만 특.. 2015. 2. 14.
패배의 어떤 정직함 2015. 2. 9 1. 5일을 내내 앓았다. 근육통과 두통 속에서 어찌 된 이유에서인지 미역국을 끓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겨우 일어나 미역국을 끓였다. 국물을 먹지 않는 식습관 탓에 국요리는 한번도 해보지 않았지만 미역국만큼은 먹어둬야 하는 요긴한 국이라 오래전부터 생각했던 터라 미역을 불린 후 참기름에 볶고 냉장고를 뒤져 활용할 수 있는 재료들을 넣어 10여분을 끓였다. 미역국을 한 그릇 비우고 누웠던 몸을 일으켜 세워 앉은 채로 하루를 버텼다. 정신적인 외상을 겪는 일이 생길 때마다 어김없이 몸이 반응을 한다. 정신이든, 말이든 비규정직인 흐름이 물화하는 장소가 결국 '몸'일테니 꼬박 5일간 누워 지낸 시간 속에서 하나의 선명한 사실만이 오롯하다. 몸의 한계, 몸의 패배. 나는 이 패배를 몸과 정신.. 2015. 2. 10.
대피소에서, 곁의 사람에게-빈센트 반 고흐, 『영혼의 편지』(예담, 2005) 2014. 11. 29 1. 편지의 알짬은 구구절절한 사연이나 내밀한 내용에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다만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쓰고 싶다는 마음, 건네고 싶다는 마음의 촉발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이, 수신자라는 단 한 사람이야말로 편지의 알짬인지도 모릅니다. 편지에 ‘무엇을 쓸 것인가’나 ‘어떤 내용이 담겨 있는가’는 부차적인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보다 편지를 쓴다는 행위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지요. 그러니 세상의 모든 편지엔 누군가에게 가닿고 싶다은 마음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마음을 담는다니요. 그것이 가능할 리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편지를 쓸 때 멋지고 화려한 문장보다 마음을 담을 수 있는 문장을 찾기 위해 애를 씁니다. 마음을 문장으로 번역할 수 있을까요? 그럴 리.. 2015. 1. 28.
수업―증여―패스 2015. 1. 27 겨울 계절 학기 중에 학생들과 함께 본 영상 클립 하나를 올려둔다. 이 영상을 처음 본 건 2013년 겨울이었지만 수업 자료로 쓴 건 이번이 처음이다. '증여'와 관련 하여 세미나를 한번 만들어볼 요량으로 입문서격으로 읽기 시작한 우치다 타츠루와 오카다 도시오의 대담집 (김경원 옮김, 메멘토, 2014)을 출퇴근 길에 맛깔나게 읽던 중에 증여와 반대급부의 인류학적 작동을 훌륭하게 표상해주는 축구를 예로 들면서 는 지침이 인상적이었던 터라 오래 전에 써두었던 메모를 '현장'에서 풀어보았다. 마수미(Brian Massumi)가 축구(의 패스)를 정동(affect)이라는 힘의 흐름을 설명하는 예로 든 바 있지만 내겐 패스(pass)를 '증여'와 연결 짓는 우치다 타츠루의 언급이 보다 인상.. 2015. 1. 27.
마-알간 시 2015. 1. 21 당신의 아내 나는 당신의 아내가 나라는 걸 알아요 당신의 아내는 화를 잘 내지요 요리를 급하게 해치우곤 하지요 울었다가 금방 풀렸다가 하지요 나는 당신의 아내가 나라는 걸 알아요 당신이 나를 사랑한단 것도 내가 도무지 아내 역할을 잘 못한다는 것도 그치만 나는 당신 곁에 사는 사람 나는 당신과 살면서 나를 알아가지요 -김연희, 『작은 시집』, 꾸뽀몸모, 2015 섬광처럼 도착하는 것. 그것이 시의 본질이라 생각했다. 기다리고 기다리는 것, 서성이고 서성여야 하는 것, 시 안으로 성급히 들어가지 않고 그 앞에서, 그 주변에서 기웃거리거나 멀찌감치서 감탄하는 것. 그것이 시의 태도라고 생각했다. 기다림이 가닿을 수 없는 거리. 시의 진실이 그곳에 있다고 생각했다. 김연희의 『작은 시집』.. 2015. 1. 21.
오늘을 향해 도착하고 있는 기운 2015. 1. 20 중앙동에서 세 통의 편지를 전해 받았다. 내가 모르는 사이, 나를 향해 오고 있던 편지, 선물, 기운. 2014년부터 2015년을 향해 열심을 다해 도착하고 있는 것. 매일매일 정성을 다하는 것이 때론 막연하고 추상적인 일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여전히 그럴 수 있는 것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누군가와 무언가를 맞이 하기 위해 마중을 나가는 일과 다르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다. 새벽, 두 달 전 친구에게 보낸 두 통의 편지를 발견했다. 쓰면서 기운을 내었고 또 쓰면서 위로가 되었던 이 편지가 같은 날에 씌어진 것임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누군가가 누군가에게 보낸 것들, 누군가가 누군가를 향해 가고 있는 길. 그 누군가라는 자리가 무척이나 넉넉하고 풍족하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2015. 1. 20.
숙련되지 않는 것들, 계속해야 하는 것들 2015. 1. 19 "40세에 첫 소설을 쓰고 나서 다시 40년 가까이를 더 살았으면서도 나는 내가 아직도 충분히 젊다고 생각하는데 그것도 이야기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젊다는 건 체력이나 용모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것을 좋다고 느길 수 있는 감수성과 옳고 그름을 분별할 줄 알고 옳지 못한 일에 분노하고 부조리에 고뇌할 수 있는 정신의 능력을 말하는데, 이런 정신의 탄력을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은 각자 사람에 다라 다르겠지만 나의 경우는 글쓰기가 아닌가 한다. 글 쓴 지 40년이 다 되지만 어떻게 된 게 이 노릇에는 숙련이라는 것이 없다. 숙련은 커녕 하면 할수록 더 어려워지는 게 이 노릇이다." ―박완서, 「이야기의 힘」, 『세상에 예쁜 것』, 마음산책, 2012. 29쪽 빨래를 널면서 김두.. 2015. 1. 19.
선물하기로써의 글쓰기 2015. 1. 19 꾸역꾸역 써왔다. 안 써질 땐 스스로를 벼랑까지 몰아부쳐 쓰지 않으면 존재할 가치도 없는 인간으로 만들어 바둥바둥거리며 썼고 드물게 잘 써질 땐 이렇게 써도 되는가, 거듭 자문하며 마침내 닥달하는 심문에까지 이르게 하고서야 더디고 더디게 썼다. 문학평론으로 등단했으니 도리없이 문학평론을 써야했고 문학평론가라는 이름을 가지는 것말고는 별다른 선택지가 없어보였다. 어떻게든 써야했기에 내가 어떤 상태에 놓여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렇다해도 이 또한 글쓰기이니 어찌 기쁨이 없었겠는가. 헌데 기쁨의 순간은 잠깐이었고 아무리 애를 써도 내 것이라고 할만한 게 손에 쥐어지지 않았다. 불황 속 실직자처럼 일거리가 있으면 어떤 일인지 묻지도 않고 보수를 따지지도 않고 수락부터 했다. 원고 청탁.. 2015. 1.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