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는 볼 수 없음428 벌레들의 시간 1. ‘사람’과 ‘벌레’ 사이의 말 새로운 빈곤이 우리의 삶을 뒤덮고 있다. ‘나만 아니면 돼’라는 철지난 유행어가 영속하고 있는 시대를 주관하고 있는 새로운 강령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생존’이라는 최종 심급이 우리들의 삶을 좌우한다. 누군가가 사라져야 내가 산다. ‘절멸’의 공포가 ‘너와 나’의 ‘절연’을 조건으로 하는 셈인데, 이러한 ‘관계의 종말’은 우리들의 일상이 더 이상 경험으로 번역되지 않는다는 것을 가리킨다. 경험은 축적되지 않고 다음 세대로 전달되지도 않는다. 사람들이 내·외적으로 영락해가는 것은 이 때문이다. 경험의 빈곤. ‘생존’이 ‘경험’을 대체해버린 시대, 그것을 부끄러움이 사라진 시대라 바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도 ‘생존’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 2012. 3. 27. 단 하나의 문장도 홀로 쓰는 것이 아니다 1. 관통당하다 : 죽음과 말 손바닥 위의 모래처럼, 아니 손바닥을 스치고 지나가버리는 돌이킬 수 없는 강물처럼 시간은 언제나 인간을 빠져나간다. ‘빠져나간다는 것’은 정확히 말해 ‘관통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은 좀처럼 제 자신을 내어주지 않지만 시간만은 인간을 뚫고 지나간다. 시간은 인간을 관통한다. 인간이 죽음에 이르게 되는 것은 시간에 관통당하기 때문이다. 시간의 관통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시간이 화살처럼 인간을 뚫고 지나갈 때 개별 존재는 자신의 유한성에 대해 자각하게 된다. 인간의 ‘자각’이 ‘관통「당」하는 순간’에만 찾아온다는 것을 상기해보라. 어떤 자각인가? 인간이란 ‘죽음 앞의 존재’에 다름 아니라는 사실, 그것은 시간의 관통을 피할 수 없다는 존재의 겸허함을 가리킨다. ‘자각’이란.. 2012. 3. 23.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 '얼굴' 이제는 통용되지 않는 이야기가 되어버렸지만 자신의 출생지가 ‘다리 밑’이나 ‘육교 아래’라는 ‘사실’을 알고 격심한 혼란을 겪던 세대가 있었다. ‘아이’가 어떻게 생겨나는지 ‘설명’할 수 없던 시절, ‘다리 밑’과 ‘육교 아래’는 성교육을 대신할 수 있는 탁월한 구조물이기도 했고 동시에 아이를 길들이는 ‘훈육의 공간’이기도 했다. ‘다리[육교] 밑’에서 아이를 주어왔다는 시쳇말은 인류의 저 오래된 ‘출생 서사’를 변주한 것이겠지만 한편으론 도시의 급속한 인구 팽창 현상으로부터 파생된 이야기처럼 보이기도 한다. ‘다리[육교]’는 도시의 관문이기도 하고 도시를 가로지르기도 한다. 그러니 밖에서 오는 ‘아이’와 ‘유이민’들은 모두 ‘다리[육교] 밑’에서 온 것이지 않을까. 근래 들어 육교가 많이 사라지고 있는.. 2012. 3. 8. 김반 일리히 일기(3) 거지가 없다 보행자를 우선 시 하는 ‘X자 형 횡단보도’가 늘어나고 있다는 생각이 별스럽게 일찍 개학한 한 대학에 강의를 하러 가는 길 위에서 떠올랐다. 보행자(달리 말해 걸을 수 있고 갈 곳이 있는 이)가 편해진 것은 분명하지만 육교[다리]가 없어지고 있다는 것에 관해 누구도 의문을 가지지 않는다. 그것은 걸을 수 없고 갈 곳이 없는 이가 모두 어디로 갔는가에 대한 물음을 가지지 않는 것을 가리킨다. 이곳에서 저곳으로 건너가기 위해서는 ‘육교[다리]’를 건너야 헸는데, 육교를 오른다는 것은[‘너머’로 건너간다는 것은] 그 위에서 걷지 못하는, 갈 곳이 없는 이들을 지나쳐[만나]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는 사실. 육교가 사라졌다. ‘거지’가 사라졌다. ‘거지’라는 단어를 서스름 없이 쓰는 나를 비난하겠지만 이제 ‘거.. 2012. 3. 5. 김반 일리히 일기(2) 반찬 생각 모처럼의 휴일이 너무 짧게 느껴지는 건 단 하나의 문장도 읽거나 쓰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만두칼국수를 먹기 위해 에 갔다. 한동안 손님이 없었는지 늘 김이 서려있는 창문이 깨끗했다. 0.5평도 안 되는 공간에 시어머니(추정)와 며느리가 (소리로 추정)을 보고 있었다. 후덕한 인상의 여주인(며느리)은 냉큼 일어나 국수를 삶는다. 그러나 하루의 첫번째 끼니인 내 앞에 도착한 칼국수는 완전히 익지 않았다. 핸드폰을 꺼내 저장해두었던 에 실렸던 가라타니 고진의 인터뷰 기사를 보면서 칼국수가 익기를 기다렸다. 인터뷰는 싱거웠고, 칼국수는 좀처럼 익지 않았다. 단무지를 두 개째 먹다가 반찬이 없어지면 세계는 지금보다 조금 더 평화로워지지 않을까란 생각을 했다. 베트남이었는지 홍콩이었는지 중국이었는지 정확하게 기.. 2012. 2. 26. 김반 일리히 일기(1) 콜라와 나쁜 생각 콜라를 마시겠다 결심한 것은 아마도 나쁜 마음이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늦은 식사를 마치고 학교로 올라오면서 나는 별안간 아이스크림을 생각하게 되었다. 밥을 먹을 땐 물을 마시거나 국물을 잘 마시시 않는 나이지만 오늘은 식당에 앉자마자 물 한 잔을 비웠고 식사를 마치고 입안을 청소하기 위해 머금은 한모금은 평소보다 두 배는 많은 양이었다. 목이 탔다. 그래서 나는 나쁜 마음을 가졌던 것 같다. 아니 나쁜 마음을 가졌던 탓에 목이 탔을 수도 있겠다. 아이스크림을 떠올렸고, 무수히 많은 아이스크림에 질려 더 나쁜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콜라를 마시기로 했다. 진작에 그 생각을 했으면 집 앞 우리마트에서 콜라를 살 수 있었을 것을, 온통 편의점으로 둘러 싸인 곳에서 나는 콜라를 골라 마시겠다는 나쁜 .. 2012. 2. 25. 핸드폰은 고장나지 않는다 핸드폰을 사용하지 못한 일주일동안, 내 핸드폰은 고장 났었지만 나는 핸드폰을 쓰는 버릇, 핸드폰이 만든 세계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했다. '핸드폰적 구조'란 핸드폰이라는 기기가 만들어내는 힘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핸드폰적 구조는 개별자들의 행위 양식과 그 양식의 관계를 결정하는 '테크놀로지의 네트워크'를 의미한다. '핸드폰'이라는 항에 문제가 생기면 '컴퓨터'라는 항이 이를 대체한다[컴퓨터를 통해 문자 메시지를 보낼 수도 있고 내게 수신되는 문자의 내용도 알 수 있다. 물론 네트워크에 '접속'하고 있을 때에 한에서]. '나의 핸드폰'이 고장나면 '너의 핸드폰'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고장 난 나의 핸드폰은 '정지'해 있지만 너의 핸드폰의 사용빈도가 그 고장과 정지를 대신해 더 활발하게 움직인다. 흡사 보.. 2012. 1. 22. 작은 것들의 정치 : 오늘, 우리는 '급진적 정치'라는 '야동'을 끊을 수 있는가? 1. '정치적인 것'이라는 '포르노그라피' 우연한 계기로 몇몇의 사람들과 한 권을 책을 같이 읽게 되었습니다. 특출나지는 않지만 이야기할 거리가 풍부한 책을 선정해야했기에 선택한 것이 제프리 골드파브의 (이충훈 옮김, 후마니타스, 2011)입니다. 책을 읽으면서 파생된 단상들을 거칠게 기록해보았습니다. 서둘러 말한다면 는 별다른 감흥을 느낄 수 없는 책이었습니다만, 외려 감흥을 느낄 수 없다는 그 사실이 슬며시 보여주는 대목들에 집중해보고 싶었습니다. 말 그대로 '단상'들에 불과하지만 천천히 그 단상들에 논리를 만들어 갔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습니다. 책의 제목과 심플한 디자인이 주는 기대와는 다소 다른 전형적인(?) 사회과학 서적이었던 탓에 생각만큼 활발한 논의를 교환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바로.. 2011. 11. 24. 어두운 시대의 '어휘'들 더 어두워졌다. 한 시대의 어둠을 막아내는 것의 어려움보다 ‘어둠’을 감지하는 감각이 점점 무뎌지고 있기에, 앞으로 더 어두워질 것이다. ‘어둠’을 감지하는 감각의 퇴화는 우리의 삶이 자본이라는 환등상(Phantasmagoria)이 제시하는 길만을 좇고 있다는 것에 대한 반증이다. 이전보다 살기 더 편해지지 않았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다. 왜 밝은 것들은 보지 않고 어두운 것만 보냐고 힐날할지도 모르겠다. 어둠 쪽으로 몸이 기우는 것, 아픈 곳에 자꾸 손이 가는 것은 아마도 ‘문학이라는 병’을 여전히 앓고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그 병이 자꾸만 무언가를 하게 한다. 읽고 쓰고 만나게 한다. 그러나 그 힘이 너무도 미약한 탓에 온통 사라지는 것 투성이다. 문학도, 사랑도, 당신도 점점 더 어두워지고 있다. .. 2011. 11. 19. 존재의 조건 : 공명(共鳴)―공동(共同)―공생(共生) 1. 구덩이에 빠지다 산다는 것은 구덩이에 빠지는 일과 같다. 그것은 우리들의 삶이 나락으로 떨어지거나 진창을 구르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구덩이에 빠진다는 것은 개인의 실착이나 체제의 함정을 가리키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삶의 자리 혹은 삶의 영역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삶이란 ‘예측할 수 없음’을 조건으로 할 때 비로소 제 모습을 드러낸다는 점을 상기해볼 때 구덩이에 빠진다는 것은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삶의 형식과 닮아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다. 우리들은 무언가를 쫓고, 쟁취하고, 추구하는 데서 삶의 동력을 찾곤 하지만 실은 무언가에 사로잡힐 때 비로소 살아 있음을 느끼게 된다. 구덩이에 빠진다는 것은 무언가에 사로잡힌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바로 그것이 삶의 패턴을 설명하는 데 활용되곤 하.. 2011. 11. 16. 이전 1 ··· 36 37 38 39 40 41 42 43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