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는 볼 수 없음428 2 : 8의 구원 2014. 10. 13 * 작년 이맘 때 기고한 글이 실린 독립 잡지를 오늘 등기로 받았다. 영화제 기간이었고 밀린 원고가 있었음에도 몇 가지를 포기하며 애를 써서 원고를 썼던 것은 지역/독립/영화/비평/잡지라는 의 포지션 때문이었다. 꽤나 늦게 도착한 셈이지만 우체부가 직접 전한 잡지를 펼쳐 잊고 있었던 글을 다시 읽어본다. 언젠가 에서 만났던 박준범 감독의 새 작품을 어서 빨리 볼 수 있었으면 한다. '그곳'에서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지난 시간도, 지난 장소도 모두 폐허다. ** 어떤 이유에서인지 잡지에 송고한 원고의 반단락이 누락 되어 있어 바로 잡아 올려둔다. 보여주고 싶은 것과 보여줘야만 하는 것 ‘선택’이란 무언가를 버릴 때만 가능하다. ‘가능하다’라는 술어를 가지고 있음에도 나는 이.. 2014. 10. 13. 고장난 기계(2) 2014. 10. 12 단순하고 명징한 일상이 매일 지속되고 반복되는 것이 새삼 신기한 일임을 알게 되는 순간은 그것이 중단되거나 파괴되었을 때다. 너무나 복잡하고 비논리적이어서 하나의 어휘로 지칭할 수 없는 탓에 우리는 그것을 짐짓 모르는 척, 슬그머니 '일상'이라고 무심히 불러온 것이다. 이 복잡하고 신기한 일이 일상이라는 이름으로 지속되고 반복된다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동시에 위험한 일이기도 하다. 일상이 (의심없이) 지속된다는 것은 우리가 일상이라는 이 복잡하고 비논리적인 구조가 어떻게 '지속'이라는 상태로 유지되는지 조금도 모르는 상태에 놓여 있음을 가리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복잡한 기계를 처음 만나는 순간 또한 그것을 편리하게 사용할 때나 아무런 문제 없이 작동할 때가 아니라 고장났을 때.. 2014. 10. 12. 일미一味, 우정의 맛 2014. 10. 6 이사한 송도 집에 도착한 첫번째 우편물, 김이설 소설가의 중편소설 한 권. 여름에 쓴 짧은 글에 대한 답장처럼 도착한 두꺼운 편지 같은 책의 안쪽에 적혀 있는 직접 쓴 정갈하고 고운 글씨를 읽다가 김이설 작가의 소설을 처음 읽었던 시절을 떠올려본다. 2006년, 하단의 어느 지하실에 옹기종기 모여 그 계절의 단편들을 함께 읽었던, 지금은 사라진 모임. 사람과 장소는 바뀌었지만 나는 꽤 오랫동안 후배들과 함께 ‘비평 세미나’라는 것을 진행했었는데, 김이설 작가의 첫번째 소설집도 그 모임에서 읽었다. 기회가 닿아 짧은 글을 썼고 아마도 그 글을 김이설 작가가 읽었나 보다. 첫 페이지의 문장들과 ‘작가의 말’을 천천히 읽고 밥을 지었다. 어제, 내 친구 진희가 만들어준 일미 반찬. 도시락.. 2014. 10. 6. 노인의 몸짓으로, 노인이 되어버린다 해도 2014. 10. 3 남천동 시절, 볕이 잘 들지 않는 내 방 주변으로 두 채의 빌라가 들어섰다. 근 4개월 동안 매일 아침 6시부터 나는 하나의 사실을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집을 부수는 것보다 집을 짓는 소음이 더 크다는 것을. 무언가를 없애버리는 것보다 새롭게 무언가를 만드는 것이 더 요란하다는 것을. 매일 아침 침대에 앉아 어쩌면 당연한 그 사실을 뒤늦게 알아 버린 것을 책망이라도 하듯 불성실한 잠을 요란하게 깨우던 기고만장한 소음 속에서 나는 몇 시간이고 그렇게 그 무엇도 하지 못하고 황망하게 있었다. 어느날 밤, 내가 살고 있는 동네에서 가장 큰 집의 허물어진 잔해더미 위로 조용히 꿈틀거리는 움직임에 섬칫, 발걸음을 멈추었던 적도 있다. 곳곳에서 움직이던 그림자들은 더렵혀진 장판과 각목을 느.. 2014. 10. 3. 대피소(1) '히요식당'_장성시장 <나유타 cafe> 2014. 8. 11 / 9. 29 "홀스하우저의 급식소가 당시 자발적으로 시작된 많은 공동체 회관과 구호사업 가운데 하나였던 것처럼, 그녀가 보여준 융통성과 다채로운 능력은 많은 재난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반응이다. 재앙이 닥쳤을 때, 낯선 사람들은 친구가 되고 협력자가 되며, 물건을 자유롭게 공유하고, 즉석에서 새로운 역할을 맡아서 해낸다. 돈이 그다지 큰 역할을 하지 않은 사회를 한번 상상해보자. 사람들이 서로를 구조하고 서로를 보살피는 사회, 먹을 것을 나눠주고 대부분의 시간을 집 밖에서 함께 보내는 사회, 사람들 사이의 오랜 벽이 무너지고 아무리 가혹한 운명이라도 함께 공유함으로써 한결 가벼워지는 사회, 좋은 족으로건 나쁜 쪽으로건 한때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가능해지거나 실재하는 사회, .. 2014. 9. 29. 연인이라는 어리석음으로 잠깐 켜는 희미한 등불-<부운浮雲 Floating Clouds>(1955) 나루세 미키오成瀬巳喜男 가난한 연인들, 어리석은 연인들. 연인이라는 어리석음. 한 때 달고 맛있게 먹었던 열대과일과 같은 시간. 도피 여행 중 그들처럼 동남아 시절을 보낸 여관 주인의 물음. "두리안 먹어봤지요?" 카메라는 1초정도 유키코의 흔들리는 표정을 담는다. 난처하고 곤혹스러운 그 표정은 돌아갈 수 없는 시간에 대한 안타까움이었을까, 열대과일이 없는 세계에서 열대과일을 찾고 있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들여다봤기 때문일까. 그 누구도 사랑할 수 없는 세계에서, 한사코 다른 이를 쫓는 남자(도미오카)와 불가능한 사랑을 쫓는 여자(유키코)는 가끔 함께 길을 걷는다. 눈앞의 모퉁이만 지나도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는 없는 길을, 폐허가 되어버린 세계를 이 두 사람은 서로에 기대어 쓸쓸하고 소중하게 걷는다. 아주.. 2014. 9. 28. 남천동 2014. 9. 19 남천동_2014. 9. 9 2014. 9. 19. 고장난 기계-황정은, 『백의 그림자』(민음사, 2010) 2014. 9. 12 새벽에 깨어 한참을 누워 있었음에도 여전히 새벽이었다. 일어나 미루어 두었던 별강문을 정리하기 위해 일년 반동안 매달 1회씩 진행하며 쓴 10편의 별강문을 다시 읽어보았다. A4 44장, 원고지 274매. 매회 10~15명의 동료들이 문학의 곳간을 함께 열어주었기에 그에 응답하고자 쓴 글들을 다시 매만졌다. 내가 쓴 글이었지만 홀로 쓴 글이 아니었기에 생경한 문장들이 많았다. 뒤늦게 도착하는 문장들, 시간들. 아니 어쩌면 제 시간에 도착하는 편지들. 특이한 것은 최근에 쓴 별강문일수록 생경함이 더 크다는 점이었다. 올 봄, 에 초대되었던 한 작가가 사석에서, 에서 선물 받았던 별강문을 지금도 종종 읽어본다는 말을 전해주었을 때는 그렇게 다시 읽고 기억해주어 감사하다는 생각뿐이었는데,.. 2014. 9. 12. 곁의 조난자 2014. 9. 1 조난자를, 가라앉고 있는 이를 구조할 수 있는 이는 누구인가? 거대한 화물선과 유조선은 조난자를 알아보지 못한다. 높고 거대한 그곳에서는 조난자가 보이(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조난자를 발견하는 이는, 조난자를 구조하는 이는, 또 다른 조난자다. 인도양을 항해하던 한 남자가 선박 컨테이너 박스와 충돌해 조난 당한다. 예측불가능한 바다의 조건, 삶 속의 도사리고 있는 불가항력적인 재난. 한 남자가 바다 위에서 거의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과정은 거의 모든 것을 수행하는 일이기도 했다. 그렇게 마지막 남은 고무보트 또한 불에 타버린 뒤 가라앉는 (2013)의 마지막 시퀀스의 한 장면. 가라앉고 있는 이를 깨우는 하나의 불빛.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바다 위에서 그는 거의 모든 것을 했다... 2014. 9. 1. 곁이라는 대피소(1) 소금과 물 2014. 9. 1 소금과 물. 최소한의 것. 무력하고 절망적인 것. 그러나 무력함은 무력해진다는 것이 아니며 절망적인 것은 절망한다는 것이 아니다. 무력에 무력해지지 않기 위해, 절망에 절망하기 않기 위해 필요한 것. 그것을 가져다 주는 이. 곁에서 그 최소한 것을 먹었는지 물어봐주는 이. 그 무력한 물음을 반복하는 이. 곁에서 함께 견디는 이. 애달음. 마음이 타들어간다는 것, 마음이 닳아간다는 것, 그것은 동일시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닮음이다. 애달음이라는 닮음. 그런 닳음. 혹여나 더 필요한 게 없는지, 소금과 물만 허용된 이에게 무용한 질문을, 무용한지 알면서도 성실히 반복하는 애달는 이. 그렇게 바깥으로, 삶의 자리로 정성을 다해 이끌어주는 이. 소금과 물. 곁의 사람. 곁이라는 대피소. 2014. 9. 1. 이전 1 ··· 28 29 30 31 32 33 34 ··· 43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