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복하는 생활163 이별례離別禮 (2) 2015. 6. 1 “1972년 9월 18일에 이현필이 창설한 금욕 수도 집단인 동광원 벽제 분원에 필자가 스승 류영모를 모시고 원생들의 수련 모임에 참석한 일이 있다. 류영모가 강사로 초청되었다. 류영모는 밤 10시부터 코를 골면서 잠이 들었다. 그러고는 새벽 3시에 일어났다. 필자도 따라 일어났다. 함께 맨손 체조를 하고는 손바닥으로 몸의 살갗을 문질렀다. 냉수 마찰 대신에 살갗을 문질러 피돌리기를 하는 것이다. 다 마치고 방을 거닐던 스승이 털석 주저앉았다. 이 사람은 스승이 뇌빈혈을 일으켜 쓰러지는 줄 알았다. 퍽 쓰러지듯이 주저앉으면서 하는 말이 “그도 지금쯤은 일어났을 터인데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내 생전에 돌아오려는지.” 류영모가 ‘그’라고 한 이는 물을 것도 없이 제자 함석헌을 .. 2015. 6. 1. 꼭지와 뿌리(1) 2015. 5. 27 식사 준비를 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이 있음을 알게 된다. 꼭지와 뿌리 제거 하기. 홀로 끼니를 채우는(해결이 아니다) 시간이 늘어가면서 자연스레 ‘먹고 있는 것’과 ‘먹어야 하는 것’에 대한 생각이 많아진다. 얼핏 게으르고 무심해보이는 ‘주중 채식’이란 말을 접했을 때 마음이 동했고 식재료를 늘려가기보단 줄여가기의 방식으로 끼니를 다른 방식으로 채워보고 있는 중이다. 아직까지 각종 ‘볶음’에 의지하고 있지만 빼놓지 않는 샐러드가 ‘무침’의 일종일 수 있다면 부족하나마 내 끼니에도 다른 궤적이 생기고 있는 중이라 말해볼 수도 있겠다. 야채와 과일을 손질하는 시간이 늘어가면서 새삼 그것들 중에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버리는지 들여다보게 되는 일이 잦다. 꼭지는 필연적으로 제거.. 2015. 5. 27. 생활이라는 부사 2015. 5. 4 잠깐, 하는 사이에 놓쳐버렸다. 놓친 것을 다시 잡기 위해 뒤쫓다가 잠시, 길을 잃었다. 붙들 수 없는 것을 붙잡으려는 애씀에 기댈 때 일상이 겨우 지켜진다. 까치발을 세워 잠시 넘어다보는 것이 일상이다. 그러니 일상은 놓치는 것 투성이이자 너머를 볼 수 없는 담벼락으로 둘러싸여 있다. 깜빡하고 잠들어버렸을지라도 이내 깨어나는 것처럼, 그라운드를 누비는 선수라면 실수로 공을 놓쳤더라도 다음 번엔 당연히 그 공을 잡을 수 있다 믿어야 한다. 생활인(生活人)이 일상을 대하는 태도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숱한 한계와 실수를 마주하는 일이 바로 '생활'이다. 생활을 잘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성과 없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한계와 실수'를 제대로 마주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잠깐과 .. 2015. 5. 5. 다행(多幸)-절망하기(5) 2015. 4. 21 외출했다 집으로 돌아오니 정전되어 있었다. 밥통을 열고 밥을 만져보았다. 온기가 거의 남아 있지 않은 걸보니 전원이 내려간지 3-4시간은 지난 듯하다. 초를 찾아 불을 붙였다. 심지가 안으로 말려 들어가 있어 불이 붙지 않았다. 오랫동안 불을 쬐어 초를 녹였다. 심지가 보이지 않았다. 심지를 찾을 수 없는 초, 어쩌면 심지가 뽑혀 있던 초. 냉장고에 넣어둔 식재료들이 상하겠다는 생각 때문에 속상했다. 공사 인부들이 오전부터 건물 외벽을 청소하느라 종일 물을 뿌려대던데, 아마도 그 여파로 누전이 된 게 아닐까 생각하니 더 속상했다. 어둠 속에서 잠시 발을 굴렸다. 여기 저기 수소문 한 뒤 '정전 시 대처 방법'에 따라 콘센트를 뽑고 하나 하나 확인하며 다시 켜보았다. 문제는 1층 어딘.. 2015. 4. 22. 도서관에서 만난 사람(2)-성문 앞에서 2015. 4. 19 시립 도서관을 빼곡이 메운 사람들의 틈바구니에서 잠깐 고개를 들어 눈을 감고 생각한다. 나는 지금 어떤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인가. 아무런 욕망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표정을 짓고 있는 이들은 도대체 누구인가? 움직임이 최소화되어 있는 사람, 산을 오르는 등반가처럼 환경에 예민한 사람, 생존을 위한 필수품을 챙기듯 하루 하루 자신에게 꼭 필요한 것들을 빠짐없이 챙겨 정해진 시간에 도착해서 정해진 시간에 떠나는 사람. ‘시험’을 준비하는 사람이란 이제 특별할 게 없는 평범한 이들 중 하나일 뿐이다. 더 멀리 뛰기 위해 오래도록 움츠리고 있는 사람들. 별다른 목적 없이 올라온 도서관에서 각자의 도약을 준비하고 있는 사람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괴이한 열기에 휩싸이기도 한다. 백지(수표)처럼 .. 2015. 4. 19. 다음 날 2015. 4. 17 ‘다음 날’은 돌이킬 수 없는 무력한 날의 모습으로 도착한다. 그런 다음, ‘다음 날’은 무너져버린 바로 그 날을 일으켜 세워야 하는 명령으로 거듭 도착 한다. 비극 다음 날, 우리는 아직 무사하다는 안도감이 아닌 더 큰 비극이 오고 있음을 예감해야 한다. 하여, ‘다음 날 ’ 우리는 슬픔을 어금니로 물고 다시 물어야 한다. 서둘러 폐쇄된 문으로 다가서야 한다. 더 큰 비극이 우리를 덮칠 것이다. ‘다음 날’은 우리를 심문하고 심판하는 날이기도 하다. 구조 요청에 응답 하기를 실패한 다음 날은 우리가 구조 요청을 해야 하는 날이기도 하다. 다음 날은 구조 요청을 해야 하는 날이면서 실패했던 구조 요청에 다시 실패할 수도 있는 날이다. 다음 날은 구조 요청이 계속 되는 날이다. 구조 .. 2015. 4. 19. 오늘 각자의 윤리-절망하기(4) 2015. 4. 16 2015년, 다시 돌아온 4월16일. 영영 돌아오지 못한 이들을 잠깐 머금는 기일(忌日). 금식(禁食)하다. 음악을 듣지 않고, 소리내어 웃지 않고, 누구에게도 연락하지 않았다. 상복을 갖춰 입고 종일 벗지 않았다. 유별난 일도, 유의미한 일도 아님을 알면서 무용한 애도를 했다. 홀로 무용함의 목록을 늘려가는 일, 아니 채워가는 일에 집중해보았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기껏 내가 할 수 있는 애도가 '하기’(행위)가 아니라 '하지 않기’(금지)의 방법에 기대고 있음을. 하지 않음으로써 하기. 그런 것에 머물러 있어도 괜찮은 것일까. 네 시간 수업을 했고 조금 읽고 겨우 메모 했다. 글쓰기 또한 '하지 않음으로써의 하기'임을 선명하게 알게 된다. 무용함을 조건으로 하고 있는 일들의 목.. 2015. 4. 17. "백판거사(柏板居士)"-절망하기(2) 2015. 4. 11 류영모는 잣나무로 만든 널판을 안방 윗목에다 들여놓고 낮에는 방석 삼아 그 위에 앉아 있고 밤에는 침대 삼아 그 위에서 잤다. 사람들이 류영모의 집에 찾아가 널판 위에 꿇어앉아 있는 류영모의 모습을 보고는 죽은 이가 다시 살아나 칠성판 위에 있는 것 같아 섬뜩한 느낌이 든다고 하였다. 안방에 널판을 들여다놓고 그 위에서 40년 동안이나 산 이는 일류 역사에 류영모가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이다. 류영모가 앉고 누운 잣나무 널판은 상가(喪家)에서 쓰는 널감이었다. (중략) 류영모가 쓴 잣나무 널판의 두께를 재어보니 3치(약 9센티미터)이고, 폭은 3자(약 90센티미터), 길이는 7자(약 210센티미터)였다. 류영모가 널판 위에 사는 전무후무한 기행을 한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2015. 4. 12. 절망하기(1) 2015. 4. 10 꽃 진 아침, 눈을 뜨자마자 ‘절망’이라는 단어만이 텅 빈 방에 오롯하다. 어째서 ‘절망’인 것일까. 이 생생한 오롯함의 정체는 무엇인가. 숨죽이고 생각하다 처연히 고요해진다. 절망한다는 것. 바라던 것(望)을 버려야만 하는 일(絶), 희망이 끊어지는 것은, 희망을 단념하는 것은 무자비한 일이다. 그런데 절망은 누구에게나 아무 때고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바라던 것을 단념하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며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절망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는 것’이라는 점을 새삼 환기하면서 나는 눈을 뜨자마자 대면해야만 했던 이 생경한 감정을 한켠으로 밀쳐낼 수도, 애써 외면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곧장 물어야만 했다. 절망이 ‘의지’일 수 있을까. 절망.. 2015. 4. 10. 영혼에 이르는 길 2015. 3. 28 좋은 글에 이끌렸던 시간이 짧았던 것, 글과 그 글을 쓴 사람(살이) 사이의 낙차로 인해 상처를 받기도 전에 글을 의심하게 되었던 것은 아마도 내가 바로 그 글을 쓰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쓰는 글과 나(삶) 사이의 낙차를 들여다보면서 글을 맹신하는 것이 무척 위험한 일임을 인지하게 되었다. 말에 이끌리게 되었던 것은 사람의 말에는 사람살이(생활)가 묻어 있었고 온기가 전해졌기 때문이었다. 그 사람의 '음성'과 '표정', '몸짓'이 말을 타고 내게 전해질 때 그간 볼 수 없었고 알 수 없었던 세계가 '물질성'을 띄고 나타나는 듯 했다. 아직 나타나지 않은 것이 사람의 말을 타고 나타날 수도 있음을, 그런 희망을 품었다. 사람의 말이란 어쩌면 뜻이 있는 소식을 전하는 복음(福音.. 2015. 3. 28. 이전 1 ··· 6 7 8 9 10 11 12 ··· 17 다음